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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가족 같은 노동 / 박정훈

등록 2017-01-08 16:06수정 2017-01-08 19:28

박정훈
알바노조 위원장

이웃집 딸 이름으로 시작되는 슈퍼 간판이 번쩍번쩍한 편의점 간판으로 바뀌고, 밥만큼은 넉넉하게 퍼주던 동네 식당이 공기밥 1000원의 야박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으로 변했다. 외상도 하고 음식도 나누던 이웃사촌의 옛 추억과 정은 사라졌지만 딱 하나, 사장님과 알바노동자의 ‘가족 같은 관계’는 남았다.

근로계약서 쓰자는 말에 ‘사장님 못 믿냐’는 답이 나온다. 주휴수당 미지급을 노동청에 신고하면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의리’를 찾는다. 대기업 로고가 박힌 말끔한 유니폼과 달리 사장과의 관계는 끈적하다. 사장은 자본이 정한 가맹비, 임대료 등 냉정한 규칙을 준수해서는 도저히 이윤을 낼 수 없어 사람 냄새 나는 법 위반을 선택한다.

1997년 구제금융(IMF) 이후 사람들은 정규직 노동시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지고 둘의 차별이 심각해지는 것에 주목했다. 2017년 정규직과 비정규직 바깥의 노동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취업준비생, 퇴직자, 주부들이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하는 것을 넘어서, 대기업의 서비스 사업을 돌리는 저렴한 연료로 활용되고 있다. 알바노동자 입장에서는 정규직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위한 취업준비 비용, 국가로부터 받을 수 없는 복지수당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지만, 대기업 입장에서는 자기 회사에 들어오는 것을 꿈꾸거나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들을 비정규직보다 값싸게 쓰는 것이다.

나는 이를 제3노동시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제3노동시장을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비용은 기업이 아니라 부모의 임금, 은행 빚, 여성의 출산으로부터 나온다. 나라가 가임기 여성 분포도를 제작 배포한 이유도 값싸고 양 많은 시간당 6470원짜리 인간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아닐까. 물론, 과거에도 3차 하청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 노동자 등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분할 수 없는 노동이 존재했다. 주목할 것은 대기업이 알바노동자를 상대로 조직적인 노무관리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슈가 된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카페는 주휴수당을 안 주기 위해 14.5시간 근로계약을 맺고, 영화관은 퇴직금을 안 주기 위해 10개월 계약을 맺는다. 노동법에 대한 지식과 일사불란한 시스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택배 상하차 알바 관련 상담을 하다가 회사 이름이 대한통운이 아니라 파견업체 큐오스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편의점 씨유(CU) 알바 채용공고를 보고 클릭했더니 아웃소싱 대표 기업 스탭스(STAFFS)가 나왔다. 피자헛,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 배달도 부릉(VROONG)이라는 배달대행업체가 맡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꼼수로 알바를 착취하긴 하지만, 이마저도 본사가 직접 책임지기 싫어 파견업체와 가맹시스템을 활용한다. 그래서 알바노동 시장에는 노무사가 조언했을 것이 분명한 대자본의 세련된 착취와, 가맹점 사장의 봉건적 착취가 동시에 나타난다.

대기업은 기존 사회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취업준비생과 백수, 해고자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계는 편의점 알바, 식당 아주머니, 무직자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 우리에게 기본소득과 같은 임금노동 밖의 소득 대안과 백수는 물론 청소년에서 노인까지 모든 국민이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 필요한 이유,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힙 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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