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5·16 군사정변 100일쯤 뒤인 1961년 9월3일, 한국전력은 형광등 33만2천여개를 ‘10개월 월부’로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절약되는 전기요금을 고려하면 10개월 월부는 사실상 공짜였다. 이와 동시에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는 형광등 제조업체들의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이 직후,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 가로등이 형광등으로 바뀌었다. 당시 신문들도 형광등의 이점을 열심히 선전했다. 자연광에 가까워 눈이 덜 피로하다는 둥 백열등보다 전력 소모가 적어 경제적이라는 둥 심지어 형광등이 발산하는 자외선이 건강에 좋다는 둥. 이듬해 4월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모 신문에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서울의 거리는 희미한 가로등이 깜빡일 뿐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감을 금치 못하게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형광등이 찬란히 빛나는 지금의 서울 거리에서 우리는 뭔가 새롭고 발전된 것을 읽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당시 형광등은 군사정변이 바꿔놓은 세상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물건이었다. 정변 주도세력은 백열등에 ‘구악’을, 형광등에 ‘청신한 기풍’을 대응시키려 했다. 방전(放電) 과정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형광물질에 투사하여 가시광선을 얻는 기술은 백열등보다 먼저 발명되었으나, 이것이 실용화한 것은 1938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의 기사 조지 인먼에 의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중반께부터 주로 탁상용 조명등으로 수입되어 일부 부유층 가정에 자리잡았으며, 1950년대 말에는 국내 생산도 개시되었으나 품질이 조악하여 환영받지는 못했다. 형광등이 가정과 거리로 급속히 확산한 것은 군사정권에 의해 ‘새 시대의 빛’으로 지정된 이후였다. 초기의 형광등은 스위치를 누르면 몇 차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다가 비로소 계속 빛을 발했다. 여기에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더러 ‘형광등 같다’고 하는 관행이 생겼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자란 탓일까? 이 사회 최고 엘리트 중에도 다급해지면 형광등이 되는 사람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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