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법률가는 대체로 기존 질서의 파수꾼으로 그려진다. 셰익스피어의 사극 <헨리 6세>에서 농민 반란을 이끄는 잭 케이드가 사유재산제와 화폐의 폐지, 토지 공유 등 혁명적 공약을 발표하자 곁에 있던 ‘백정 디크’는 “그럼 맨 먼저, 법률가 놈들부터 모두 죽이자”고 외친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은 그 구호 그대로였다. 폭도들은 “법률가, 판사, 배심원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법학원과 법률가들의 숙소에 난입해 건물과 책, 서류 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불 질렀다.”(안경환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법률가가 타도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변호사 출신 혁명가도 많다. 프랑스혁명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전까지 사형 폐지를 주장하던 변호사였고, 레닌과 피델 카스트로도 젊은 변호사로 혁명에 뛰어들었다. 넬슨 만델라와 간디 역시 변호사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도 혁명가를 자처한 변호사가 나왔다. 탄핵심판의 대통령 대리인인 김평우 변호사는 ‘막말 변론’으로 논란을 빚자, “(그런 변론으로) 올바른 변호사가 아니라 대중을 선동하는 사이비 혁명가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혁명가라는 호칭을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와 동료들의 말이 매우 위태롭기는 하다. 법관에 대한 공격부터 심각하다. 공개변론에서 김 변호사는 주심인 강일원 재판관을 “국회 쪽 수석 대리인”이라고 공격하고 이정미 재판관도 “문제가 많다”고 비난했다. “아스팔트가 피와 눈물로 덮일 것”이라거나 “내란”이라는 말도 했다. 뒤따라 탄핵 반대 집회에서 “두 재판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몰살할 법률가’가 지목된 모양새다. ‘알만한 사람’이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공동체가 뒤집히지 않고 유지되려면 사법제도를 통해 갈등이 해결될 수 있어야 한다. 규칙과 틀을 존중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법제도, 특히 재판의 목적이 개인 권리 보호, 법질서 유지, 분쟁 해결, 정의 실현 중 그 무엇이라 해도 ‘게임의 룰’이 전제돼야 한다. 그 출발인 법관과 법정의 권위가 ‘막말’로 훼손됐다. 대리인단이 재판부의 판단을 학자들이 검증하자며 증인 신청까지 낸 것도 문제다. 사법권은 국민이 법원과 헌재에 위임한 권한이다. 헌법은 국회 심의 등 여러 장치를 통해 사법권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와 무관한 학자에게 사법권을 묻자는 것은 이런 틀을 부인한 것이다. 그저 막말이 아니라 법치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대통령 대리인단은 ‘헌재 결정에 승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재판관 8명의 선고는 위헌이라거나 국회 소추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다. 헌재 결정은 종국적이어서 따로 불복 장치가 없다. 불복의 이유라는 것들도 법률적으로 이미 다 논파됐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계속하는 것은 법정이 아니라 거리의 시위대를 겨냥한 것이겠다. 필요에 따라 법률 논리를 이리저리 뒤틀어 붙이는 일은 많이 봤지만, 이번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법률을 아예 내팽개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리의 탄핵 반대 시위에는 친박 정치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상당수가 법률가다. 그들이 지키겠다는 대통령은 이미 정치 지도자로선 사망한 상태다. 탄핵이 인용되면 곧바로 피의자이고, 설령 기각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뻗대는 것은 마땅한 ‘대체재’가 도무지 없으니 관이라도 둘러메고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타파해야 할 구질서를 그렇게라도 놓지 않겠다는 것이 혁명일 순 없다. 좀비도 사양 않겠다는 보수가 보수일 수도 없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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