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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모발염색제

등록 2017-03-01 17:46수정 2017-03-01 20:43

전우용
역사학자

2500여년 전,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집을 나선 석가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오랜 고행 끝에 해탈하여 부처가 되었다. 그 뒤 언제부터인가 그의 뒤를 이으려는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전부 깎아버림으로써 사고에서 해탈하려는 결의를 표현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즉물적으로 표현하는 신체 부위가 바로 머리카락이기 때문이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노쇠의 상징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이 경험에 의해 구축되던 시대에 노쇠는 지혜와 대략 동의어였지만, 속세에 미련을 끊지 못한 속인들은 어떻게든 자기가 늙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피부가 처지는 것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이지만, 흰 머리카락을 검게 바꾸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도 가능했다. 부처가 탄생하기 2천년 전 이집트 왕실에서는 이미 염색약을 만들어 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머리카락을 염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 시조집인 <청구영언>에 실린 사설시조 중에는 ‘백발에 화냥 노는 년이 젊은 서방을 맞추어 두고 센 머리에 먹칠하고 태산준령으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다 희었구나’라는 게 있다.

1907년 화학성분을 이용하여 모발 염색약을 개발한 프랑스 화학자 외젠 쉴레르는 1910년 이 제품에 로레알(L’Ore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직후 서울에 있던 일본인 상점 지요[千代]는 ‘누레하’라는 염색약을 수입·판매한다고 광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루리하’로 표기가 바뀌었는데, 모두 ‘로레알’의 일본식 표기였던 듯하다. 그런데 이 제품은 독성이 강해 종종 자살용품으로 사용되었다.

값싸고 간편한 염색약 덕분에 오늘날에는 흰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는 노인이 오히려 드물다. 사람이 늙어도 머리카락이 세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주는 염색약은, 사람이 늙어도 저절로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시대에 아주 잘 어울리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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