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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공중변소

등록 2017-03-08 19:03수정 2017-03-08 20:29

전우용
역사학자

“밥은 밖에서 먹어도 똥은 집에서 싸라.” 대략 반세기 전까지 농촌에서 불문율로 통용되던 말이다. 농경사회에서 분뇨는 퇴비의 주원료였기에 낭비해서는 안 되는 물질이었다. 바쿠후시대 일본 에도에서는 분뇨 치는 인부들이 돈을 내고 사들였는데, 부잣집과 남성의 것을 더 비싸게 쳐줬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분뇨 값을 받지 않았으나, 농촌 사람들은 값을 치러야 했다. 18세기 말 박지원이 쓴 <예덕선생전>은 서울에서 분뇨를 수거하여 농촌에 팔던 역부들의 우두머리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까지 변소는 집집마다 있었으나 다중이 함께 이용하는 공동변소 또는 공중변소는 없었다. 분뇨가 재화로 취급되었던데다가 공공의 영역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이를 위생 문제로 인식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중변소의 부재는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구실도 했다. 남성들은 종일 집 밖에서 보내야 할 경우 아무 데에서나 바지춤을 내릴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그럴 수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변소는 1896년부터 진행된 서울 도시개조 사업 과정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9월에 제정된 ‘호열자예방규칙’과 ‘장질부사예방규칙’에는 ‘공동변소에는 매일 생석회와 석회유를 살포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다. 1904년 경무사는 서울에서 ‘공중변소를 이용하지 않고 가로변에 방뇨하는 행위를 엄금’하겠다고 공포했다. 서울의 공중변소는 1907년 일본 황태자 방한을 앞두고 크게 늘어 1908년에는 20개소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공중변소는 한동안 ‘이박식당’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완용과 박제순의 식당이라는 뜻으로 저들을 똥 먹는 개돼지로 취급하는 민심을 대변한 것이다. 공중변소는 아주 오랫동안 생리적 배설 장소일 뿐 아니라 심리적 배설 장소이기도 했다. 공중변소의 문은 모두의 낙서장이었다. 오늘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깨끗한 공중변소가 한국처럼 많은 나라는 드물다. 공중변소는 서울 도심에서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시간 평화시위를 벌일 수 있게 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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