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조선 말기에 창작된 <규중칠우쟁론기>의 주인공은 자, 가위, 바늘, 실, 골무, 인두, 다리미의 일곱 가지 물건이다. 문방사우는 사대부 남성들과만 교분을 맺었으나, 규중칠우는 벗의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베짜기를 면제받은 부잣집 딸이라도 바느질까지 면제받을 수는 없었다. 바느질은 노동과 예술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인 특별한 행위여서, 사대부가에서 남편을 여읜 여성들이 흔히 택한 일이 삯바느질이었다. 홀몸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는 사람도 침모(針母)라고 불렸다. 옷 한 벌, 이불 한 채를 만들기 위해 같은 동작을 수천번씩 반복해야 하는 기계적인 작업을 기계에게 떠맡길 수 있게 된 것은 산업혁명의 전 과정에서 보면 꽤 늦은 편이었다. 손바느질보다 5배 정도 빠른 바느질 기계는 1829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명됐고, 이후 몇차례 개량과 혁신을 거쳐 1851년 미국의 싱어회사(Singer & Company)가 대량생산을 개시했다. 일본인들은 소잉머신(sewing machine)의 머신만 따서 ‘미싱’이라고 불렀는데, 그럴 정도로 이 물건은 기계문명의 대표 자격을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에 이 기계를 처음 들여온 이는 1876년 수신사 김기수를 수행해 일본에 갔던 김용원이다. 김규식의 아버지인 그는 사진술을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하다. 미국 싱어회사가 한국에 이 기계를 팔기 위해 국한문 광고지를 제작, 배포한 것은 1902년인데, 한국인들은 이 기계를 재봉틀이라고 불렀다. 규격대로 짜 맞추는 물건이 아님에도 ‘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기능이 베틀과 연속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척박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1930년께 싱어미싱회사의 조선지점 판매사원은 1천명이 넘었다. 이 물건은 먼저 각 가정집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불어 재봉틀 다루는 기술도 거의 모든 여성의 몸에서 소수 여성의 몸으로 이전됐다. 이 물건은 현대의 풍요로운 의생활을 뒷받침한 물건이자, 한국 초기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물건이며, 여전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표상하는 물건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