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디터 나는 3년 전 제주 올레 18코스를 걷다 연북정(戀北亭)에 올랐다. 연북정은 제주시 조천리 조천포구에 있는 정자다. 지금처럼 제주와 육지를 잇는 바닷길과 하늘길이 활짝 열리기 전에는 조천포구가 제주의 관문이었다. 연북정은 ‘북쪽을 사모하는 정자’란 뜻이다. 조선 시대 제주에 부임한 관리나 귀양 온 양반들은 이 정자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이들은 연북정에 올라 북녘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기쁜 소식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가끔은 소맷자락 긴 손을 이마에 대고/ 하마 그대 오시는가 북녘하늘 바다만 바라보나니…’(정호승의 시 <연북정> 가운데) 조선시대 유배객뿐만 아니다.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도 서울만 바라보는 ‘서울바라기’다. 알기 쉬운 예로 매년 대학 입시 때 수험생과 가족은 ‘인서울’ 대학 진학을 놓고 마음을 졸인다. 수험생들은 ‘인서울이 아니면 루저가 된다’고 여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지난 2월 한 강연에서 인서울 집착이 “600년 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안 지사는 조선 시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대 한양 사대문 안을 떠나지 말라”고 일렀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들을 들어 ‘조선시대 이후 서울집중 현상이 600년간 지속된 것을 고려하면 지방자치가 한국인 유전자(DNA)에 안 맞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진 않지만, 시장·도지사 등 직선제가 시작된 1995년 이후 20년이 넘도록 지방자치가 아직 뿌리를 못 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대선 후보들은 지방분권을 들고나오지만 선거만 끝나면 흐지부지 없던 이야기가 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정치·사회·경제·문화·학술·의료 등이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최근엔 ‘지방소멸’이란 말까지 나오는 위기 상황이다. 하지만 각 정당 대선 (예비)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지방분권은 비중이 낮고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다. 지방분권과 관련해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의 최근 주장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 서대문구청장인 문석진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분권개헌특위 위원장은 3월27일 서울시청에서 기자설명회를 열어 “중앙정부는 겉으로는 지방분권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을 틀어쥐고 교부금과 보조금으로 지자체를 통제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과 전국 시도지사들이 만나면 서울시장 정도만 쓴소리를 해왔다. 서울 시장이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은 서울시가 재정자립도가 높아 중앙정부에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적기 때문이다. 다른 시도는 중앙정부가 주는 지방교부세, 국고보조금 등에 의존해야 하므로 시도지사들이 대통령 면전에서 감히 쓴소리를 하기 힘들다. 문석진 구청장은 지방분권 실천방안으로는 국세인 양도소득세를 지방세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지방자치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현재 지방자치를 ‘2할 자치’라고 부른다. ‘2할 자치’는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이 8 대 2인 현실을 빗댄 표현이다. 양도소득세를 지방세로 전환하면 국세와 지방세 비중이 7 대 3이 된다. 문 구청장은 ‘지방자치단체’란 모호한 명칭을 ‘지방정부’로 바꾸자고도 했다. 지방자치단체란 말에는 독자적인 입법·행정권한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중앙정부에 종속된 하나의 단체란 판단이 깔려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사업에 제동을 건 것은 이런 발상에서 비롯됐다. 이미 일선 행정 현장에서 정부 구실을 하는 시도와 시군구를 지방정부라고 불러주는 게 명실상부하다.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조선 시대 홍길동도 아니고, 21세기 지방정부를 지방정부라고 불러주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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