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 활동가 “아이들” 또는 “우리 아이들”은 정치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 하나다.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자거나… ‘아이들’은 정말이지 온갖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없이 불려 다닌다. 그런 말은 식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꾸밈말이요 구실이다. 미래와 공익을 생각한다는 명분을 얻기도 쉽고 감정에 호소하기도 좋아서 그럴 터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이야기는 그렇게나 많은데 ‘아이들’은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다”는 말은 누구한테 건네는 말인가? 그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다. 표도 안 되고 사회적 힘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말은 청소년을 향한 것도 아니고, 청소년의 인권이나 삶의 문제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함부로 “아이들”을 들먹이고 장식으로 써먹는 정치인일수록 청소년 인권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마땅하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청소년의 문제는 종종 나중의 일로 취급당한다. 이때 ‘나중’이란 두 가지 의미에서다. 먼저, 사람들은 청소년들을 “미래세대”라고 부르며 청소년들의 문제는 주로 나중에 어른이 돼서 잘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문제로만 논한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시국선언을 하며 청소년들도 민주주의와 정치의 주체임을 보여줬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청소년들이 나중에 훌륭한 민주시민이 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돌아가고 마는 식이다. 두번째 의미는 청소년의 문제가 언급만 될 뿐 실제의 우선순위에서는 뒤로 밀려나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가령 다들 입시경쟁의 폐해를 말하지만, 정책의 실질적 초점은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보다도 사교육비나 학교 정상화에 맞춰지는 식이다. 그밖에도 2007년까지 민주주의와 개혁을 내세운 정부가 10년을 집권했지만 두발 자유화나 체벌 금지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학교 민주주의도 청소년 참정권도 그다지 나아지지 못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최근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인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는 대선 후보들에게 교육과 청소년 인권에 관해 ‘수능시험’을 출제하고 답안지를 요청했다. 이 ‘수능’이란 ‘2017년도 대선 수권(受權) 능력 시험’이다. 일부 후보가 답변을 거부한 가운데, 대부분의 후보들이 청소년 인권 보장에 대해 찬성한다고 답하거나, 내용이 미비하더라도 취지에 공감한다는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러나 몇 문제를 맞힌 후보라 해도 ‘수권 능력’이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수권, 즉 대통령으로서의 권력과 권한을 받을 능력이란, 곧 이에 따르는 책무를 잘 알고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책무 중 으뜸이 인권을 존중·보호·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권 능력 시험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시작된다. 특히 표도 없는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를 미루지 않고 자신의 책무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것이 ‘수권 능력’을 증명하는 지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이들”을 장식이나 구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시민으로 존중하고, 청소년의 인권과 삶의 문제를 나중이 아닌 지금 당장의 문제로 생각하는 세상. 이번 선거가 그런 세상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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