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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미디어 전망대] 정치인의 쇼 / 김세은

등록 2017-04-13 19:56수정 2017-04-13 20:56

김세은
강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선거를 앞두고 가짜뉴스와 여론조사가 문제되더니 이제는 ‘정치쇼’가 입길에 오르내린다. 지난 5일 안철수 후보가 새벽 지하철에서 청년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고 미세먼지 대책을 얘기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났다. 흠, 요즘 책 읽는 청년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도 기특한 젊은이가 있어서 새벽 전철에서 책을 읽고, 우연히 안철수를 만나고, 게다가 발랄하고 적극적이기까지 해서 페이스북 중계도 하는 경우의 수는 드물지만 가능하긴 하리라. 그런데 그 책 제목이 하필이면 <최고의 설득>이라니. 책 정보를 찾아보니 부제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계 정상들의 스피치”로 되어 있다. 역시나. 이건 100% 연출이다 싶었는데, 마침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 알려지면서 연출 논란이 확산되었다. 정치공방으로까지 과열되던 차에 청년이 해명을 했다. 한마디로 그 만남이 우연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라는 건데, 썩 개운치는 않지만 가능성은 늘 있는 법이니까 그러려니 해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가 5일 오전 지하철에서 만난 한 청년에게 책을 선물받고 있다. 연합뉴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가 5일 오전 지하철에서 만난 한 청년에게 책을 선물받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이 해프닝은 그것이 연출되었다고 해도, 즉 ‘미디어 이벤트’라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새롭지도 않으며 당 차원에서 치고받고 할 만한 중대한 사안은 더더구나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숱한 정치인의 무수한 정치쇼를 접해왔다. 그것이 쇼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이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쇼’를 하는 것은 그러한 미디어 이벤트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미디어 이벤트는 현대 정치구조에서 필수불가결한 보편적 현실이 됐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유권자는 그 청년처럼 우연과 노력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후보와 직접 만나거나 대화를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미디어는 그 만남과 대화의 공백을 채워주고, 대중으로 하여금 일정 정도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긍정적 기능도 수행한다.

쇼의 본질은 보여주기에 있다. 배우와 관객은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고, 관객은 오로지 미디어를 통해 배우를 볼 수 있다. 권력화된 미디어는 정치와 유권자를 매개(mediation)하는 것을 넘어 미디어화(mediatisation)를 통해 쇼의 조건과 결과를 바꾸어버린다. 다시 말해 미디어의 논리와 법칙에 맞추어 정치의 본질적 속성조차 변질됐다는 것이다. 정치의 미디어화는 탈정치화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미디어의 틀에 맞춰진 정치가 숙의의 과정은 생략한 채 이미지나 결과에만 신경을 쓴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요한데 미디어는 그 과정에 주목하지 않는다. 미디어 이벤트에 익숙해진 정치인은 맥락이 거세되는 미디어의 문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이 미칠 효과를 계산해낸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정치인의 말과 행위는 공백 상태로 들어간다.

미디어에 길들여진 건 정치인만이 아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수십 초의 영상, 몇 줄의 기사에는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들만 담겨지지만, 유권자는 이미지에 집중할 뿐 그 이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유권자조차 그런 미디어 이벤트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보조출연자가 된다.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넘치도록 만연하는 미디어 이벤트의 시대에 그 맥락과 진정성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미지와 환상이 만들어내는 허상 속에서 유권자가 저항할 수 있는 여지는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 한 달도 안 남은 선거 과정이 염려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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