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죽음을 예감한 상태다. 뒷덜미엔 투우사가 내리꽂은 작살(반데리야)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어깨와 등에도 수없이 창과 칼을 맞았다. 원형경기장을 채운 관중은 우우 함성을 내지른다. 극심한 흥분과 공포에 빠진 소는 붉은 천(물레타)을 향해 돌진을 거듭하다 탈진 직전의 상태에 도달한다. 이때 소는 피범벅인 채로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곳으로 달려간다. 자신만의 피난처 케렌시아로.
스페인어 케렌시아(Querencia)는 ‘바라다’라는 뜻의 동사 ‘querer’(케레르)에서 나왔다.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이란 의미가 있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기장의 특정 부분을 머릿속에 표시해둔다.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케렌시아로 삼는다. 그곳에서 소는 숨 고르기를 하며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에너지를 모은다. 케렌시아는 회복과 모색의 장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투우장을 자주 찾았는데 죽음을 관찰할 목적이었다. “전쟁이 끝나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투우장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투우와 글쓰기를 다룬 헤밍웨이의 논픽션 <오후의 죽음>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케렌시아에 있는 소는 다루기가 몹시 위험하고 죽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케렌시아에 있는 소를 죽이려고 덤벼들다 목숨을 잃는 투우사가 부지기수다.”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뒤늦게 합류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케렌시아 피정을 다녀왔다. 케렌시아에 있는 동안 사색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당내 경선에서 ‘안희정 멘토단장’을 했던 그였기에 케렌시아를 찾은 사연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격렬함으로 따지면 경선보다 본선이 더하지 않겠는가. ‘22일 동안의 사투’에 돌입한 대선 후보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케렌시아가 절실할 것이다. 지금쯤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려 저마다의 케렌시아를 물색하고 있을지 모른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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