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 여기로다. 일 아는 열립군과 물화 맡은 전시정은 큰 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 달고 사람 불러 흥정할 새 경박하기 측량없다.”(‘한양가’ 중) 19세기, 서울 종로거리 좌우에는 열립군 또는 여릿군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종일 늘어서 있었다. 줄지어 서 있어서 열립군(列立軍), 남은 이익을 갖기에 여릿군(餘利軍)이었다. 이들은 물건 사러 나온 듯한 행인의 소맷자락을 잡고 주인 점방 앞으로 끌고 가서는 흥정을 붙였다. 손님 편을 들어 주인이 부르는 값을 후려치는 척하며 비싸게 팔아넘긴 뒤, 주인에게 수수료를 받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끌려다녔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물건 사는 재미 중 하나였다. 게다가 ‘흥정’이라니. 물건 사고 싶은 심정과 대화하고 싶은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들의 업무였다. 1991년, 중국 여행 중 국영상점에 들렀다. 들어갈 때나 물건 고르는 중에나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모자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가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판매원에게 얼마냐고 물으니 그제야 느릿느릿 걸어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격을 알려주고 돈을 받아 서랍에 넣은 뒤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그러곤 다시 제자리. 옆에 있던 일행이 나직한 소리로 뇌까렸다. “이거야말로 인간 자판기군.” 사람 대신 물건을 판 최초의 기계는 기원전 215년 이집트 신전에 설치되었던 성수(聖水) 자판기였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담배 자판기가 발명되었고, 1908년에는 미국 뉴욕 지하철에 껌 자판기가 등장했다. 우리나라 자판기의 역사는 1977년 롯데가 일본에서 들여온 커피 자판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도시 거리와 빌딩 안 곳곳에는 어김없이 자판기가 있다. 집안의 티브이(TV)와 손안의 스마트폰도 자판기 구실을 한다. 정해진 값을 지불할 작정을 하고 버튼 몇 개만 누르면 하루 이틀 사이에 물건을 받을 수 있다. 편리하긴 하나, 자동판매기는 작정만 있고 흥정은 없는 시대, 인간이 기계를 닮아가는 시대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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