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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사랑의 파국 / 박구용

등록 2017-06-20 18:15수정 2017-06-20 19:05

박구용
전남대 교수·시민자유대학 이사장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끝말이 얄궂다.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주범은 크게 세 가지다. 전쟁이 첫째고, 불평등이 둘째다. 바우만에 따르면 사회가 해체되는 만큼 비대해진 불평등이 파멸을 불러오고 있다. 그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그 증후와 연결된 파국의 세 번째 주범을 나는 ‘사랑의 부재’라 호명한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은 그저 은유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면, 그녀에겐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사랑은 가능한 은유의 수만큼이나 다채롭게 변장을 즐기는 마법이다. 그러니 하나의 사랑, 영원한 사랑은 수많은 은유 중에 가장 허구적인 은유다. 사랑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는 과정이고 절차다. 과정으로서 사랑하기는 사랑받기와 사랑주기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 계산을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한 인생, 한 집안이 망한다.

전통 사회의 인륜적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비교적 단순하고 그만큼 명확했다. 신분 질서가 공고할 때 사랑은 인륜적 공동체의 교류와 교환이었다. 결혼은 이 거래행위의 법적 제약인 셈이다. 인륜적 사랑의 계약은 가족과 가족 사이의 거래였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사랑과 결혼의 주체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전환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회계약으로서 결혼 제도는 새로운 사랑 담론을 요구했다.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범람하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괴테, 그들의 후예들이 노래한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감정, 감성, 감각의 울림이다. 대부분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사랑은 몸과 몸 사이의 끌림, 곧 낭만으로 굳어진다. 그런데 낭만적 사랑도 교환이다. 인륜적 사랑보다 더 복잡한 교환이다. 감정과 욕망까지 거래의 주요 항목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유동적 사회에서 변동성이 높은 미래의 가치까지 계산하기 때문이다.

전방위적 접속의 시대가 되면서 어느덧 낭만적 사랑도 끝났다. 단 한 번의 영원한 사랑을 꿈꾼 낭만적 사랑은 접속 감정의 변화무쌍에 의해 해체된다. 더구나 결혼은 단 한 번의 계산으로 체결하기엔 위험한 계약으로 판명된다. 결혼도 사랑도 제도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흐르는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랑은 이제 감정보다 코드를 맞추는 접속 놀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랑과 상처가 강물을 풍요롭게 하리라 기대한다. 현실은 거꾸로다. 사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교환으로서 사랑조차 불가능하다.

불평등이 사랑의 주적이지만 지체된 의식도 큰 적이다. 거품처럼 사라진 거짓 낭만 타령에 붙잡힌 의식이 작은 사랑조차 방해한다. 한 번의 사랑, 한 번의 결혼, 한 번의 거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능한 한 신중하고 꼼꼼하게 계산하느라 어떤 사랑도 못하는 불구만 늘어난다. 어쩌다 성사된 사랑조차 감정 창고의 부익부 빈익빈을 강화한다. 약자는 강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소비하고 지출해야 한다. 강자에겐 사랑이 유희지만 약자에겐 모험이다. 감정의 빈곤상태를 오래 감내할 용기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총체적 약자로 전락한 청춘 세대들에겐 어쩌면 용기보다 비겁이 중용에 가깝다. 파국, 정서적 파국이다.

사랑은 이제 변두리 구멍가게, 골목길 편의점, 혹은 대형 마트와 백화점 중에서 어느 곳에 진열할 것인지를 분류하는 업무로 처리될 듯싶다. 사랑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사랑이 된 파국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 회고적일지라도, 광장을 휘감았던 사랑의 정치에 다시 뜻과 힘을 모아야 한다.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 세력에 맞서 더 많이 사랑하는 상상을 쏟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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