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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화해하고 공유하지 / 이라영

등록 2017-06-28 18:38수정 2017-06-28 20:54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칠레의 아옌데 정권 말기 쿠데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마추카>는 빈민촌의 소년과 부잣집 소년의 관계를 통해 계층 갈등을 보여준다. 이들 옆에는 가난한 소녀도 있다. 두 소년이 사회 계층의 상징이라면 그들 사이에 있는 한 소녀는 ‘성’의 세계로 두 소년을 인도하는 매개자로 등장한다. 동시에 이 소녀는 변화의 틈에서 뭉개지는 최후의 희생자다. 영화 속에서 군부의 총에 맞아 죽는 대상으로 낙점된 인물은 소녀다. 소녀는 관점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관점은 계층이 다른 두 소년에 의지한다. 우정도 이들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사회 변혁기를 다루는 좋은 작품들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서사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다른 계층, 다른 나라의 남성 사이에 있는 한 여자는 주로 물질적인 몸과 섹슈얼리티로 남성 세계의 공유물이 되거나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적폐라는 단어가 대선을 시점으로 만개했다. 어떤 대상을 적폐로 낙인찍는 것도 우려스럽지만, 정작 적폐를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다. 적폐란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다. 여성을 향한 성적 착취야말로 오랫동안 쌓인 폐단인데, 이 폐단을 청산하려는 의지는커녕 오히려 이를 디딤돌 삼아 ‘우리 편’을 구축한다. 오래된 착취는 여전히 ‘쿨’한 놀이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첫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어떤 남성들의 목소리와 달리, 어떤 여성들은 뒤늦게 인식한 폭력의 첫 경험을 고백한다. 누군가에겐 첫 경험이 쟁취와 정복의 유희로 남아 나이를 먹어도 활자로 남길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땐 그냥 그런 시절”(이하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 인용)이라는 말을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때’ 그 여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때? 탁현민씨는 나보다 세 살 많으니 나도 그때를 지나왔다. 그때, 바로 내가 중학생일 때 ‘오빠들과’ 가출했다가 퇴학을 당했던 여학생이 떠올랐다. 고3이 되었을 때 친구와 길에서 그 여학생과 마주친 적이 있다. 화장을 하고 구두를 신고 있어서 우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내 뒷짐을 지고 있어서 몰랐는데 헤어진 뒤 친구가 말했다. “봤어? 커피병 감추고 있는 거.” 그때 그 여학생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딱지를 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학교에서 확실하게 4등”이 되는 인물은 ‘그때는 다 그랬다’는 이해를 딛고 현재를 살아간다. 남자 앞길 막지 마라. 사회의 규칙이다. ‘앞길’이 있는 이들은 ‘그때’에 대해 ‘쿨’하다. 마음만 먹으면 ‘구매’할 수도 있는데, 구매하지 않는 정도로 이미 스스로 도덕적인 남자들은 이를 몹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나는 수많은 그때 ‘쿨’한 소녀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 둘은 곧 화해하고 바로 그녀를 공유하지.” 화해는 인격체 사이에서 가능하다. 반면 공유는 인격체가 아니라 비인격적 대상을 향한 말이다. 바로 그 비인격적 대상이 여성이다. 샘물이나 커피처럼 여성을 공유한다. 여성을 도구 삼아 남성사회의 인정을 갈망한다. (남성과) 화해하고 (여성을) 공유한다는 이 말은 여성 억압의 핵심이다. 여성은 깨달음의 도구, 남성사회 서열의 자원이다.

문화적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자유롭게’ 부추기고, 이에 대해 문제가 생겼을 때 인정하지 않는 ‘쿨’함을 남성적인 멋으로 여긴다. ‘쫄지마 시바’ 정신이다. 리버럴? 자유주의의 기본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태도다. 여자를 깔고 앉아 정치 개혁을 말하고 금기에 도전한다는 착각은 거두길. 마치 시대를 잘못 만난 고독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도 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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