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2017년 체제의 진정한 시작 / 이재성

등록 2017-07-02 17:55수정 2017-07-03 09:55

이재성

사회에디터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묘사한 미국 남부 사회가 떠오른다. 노예 해방이 이뤄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많은 백인들이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 로자 파크스와 마틴 루서 킹의 흑인민권운동이 시작되기 전, 남부 백인들의 자신감은 물리적 근거가 있었다. 사회의 주류로서 모든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그들에게 재판 절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톰의 재판에서, 백인만으로 이뤄진 배심원단은 톰에게 유리한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이 소설은 역사 발전의 도도한 흐름에 저항하는 사회 주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한 가정의 청결 상태를 보려면 화장실에 가면 되고, 한 나라의 인권 실태를 보려면 교도소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 사회의 성숙도를 보려면 그 사회의 최하층이 아니라 주류 세력의 상식 수준을 봐야 한다. 사회 주류가 사실 앞에 솔직하고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며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면 그 사회는 성숙한 사회다. 이 기준으로 보면, 백인으로서 흑인을 변호하는 애티커스 핀치-영화에선 그레고리 펙이 배역을 맡았다-를 ‘깜둥이 애인’(nigger lover)이라고 놀려대던 당시 미국 남부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보수세력은 어떤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논란을 불러온 국정원 대선 댓글 수사를 방해하려는 청와대와 호흡을 맞춰 불법적 경로로 입수한 개인정보를 공개해 검찰총장을 끌어내린 언론사, 세월호 사건의 화살이 청와대를 향할 때 구원파라는 자극적인 희생양을 발굴해 유병언 일가에게 책임을 떠넘긴 세력, 십상시 문건으로 비선실세 국정농단 실태의 일각이 드러났을 때 프레임 전환을 통해 문건유출자 색출로 마무리했던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이 한번도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타락한 정권을 감싸기 바빴던 그들은 이제 정권이 바뀌자 ‘촛불 청구서’라는 해괴한 조어로 비주류 세력을 조롱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증오의 언어로 비주류 세력을 경멸한다는 점에서 소설 속 백인들처럼 미성숙한 사회의 주류라고 자백하는 꼴이다. 이들이 희생양으로 삼는 한국 사회의 앵무새는 전교조와 민주노총, 통진당 등이다. 이들의 지침에 따르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정당하고, 민주노총의 가두시위는 합법 여부와 무관하게 늘 꼴불견이며, 통진당 해산의 법리적 결함을 지적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부적격이다. 이른바 ‘공안 마피아’의 세계관이다. 검찰·재벌 개혁 등 대선 과정에서 주요 후보들이 동의한 적폐 청산에도 딴지를 걸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이들의 태도는 자못 공격적이다. 이들의 자신감 역시 미국 남부 백인들처럼 물리적 근거가 있다. 이들은 여전히 이 나라의 중추 조직-정치·경제·법조·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주류이기 때문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 30년을 10년 단위로 쪼개보면, 보수(노태우·김영삼)-진보(김대중·노무현)-보수(이명박·박근혜)가 번갈아가며 집권했음을 알 수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진보가 집권했는데, 70년 만에 이 나라의 주류를 교체할 수 있는 기회다. 박근혜라는 쓰나미가 해묵은 지역감정과 철 지난 색깔론 등을 한꺼번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의를 현저히 왜곡하는 선거제도를 개혁해 의회권력부터 바꿔야 한다. 더 다양한 진보와 더 많은 소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일단 정치 지형만 바뀌더라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1987년 체제를 대체할 2017년 체제의 진정한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