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사회에디터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묘사한 미국 남부 사회가 떠오른다. 노예 해방이 이뤄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많은 백인들이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 로자 파크스와 마틴 루서 킹의 흑인민권운동이 시작되기 전, 남부 백인들의 자신감은 물리적 근거가 있었다. 사회의 주류로서 모든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그들에게 재판 절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톰의 재판에서, 백인만으로 이뤄진 배심원단은 톰에게 유리한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이 소설은 역사 발전의 도도한 흐름에 저항하는 사회 주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한 가정의 청결 상태를 보려면 화장실에 가면 되고, 한 나라의 인권 실태를 보려면 교도소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 사회의 성숙도를 보려면 그 사회의 최하층이 아니라 주류 세력의 상식 수준을 봐야 한다. 사회 주류가 사실 앞에 솔직하고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며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면 그 사회는 성숙한 사회다. 이 기준으로 보면, 백인으로서 흑인을 변호하는 애티커스 핀치-영화에선 그레고리 펙이 배역을 맡았다-를 ‘깜둥이 애인’(nigger lover)이라고 놀려대던 당시 미국 남부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보수세력은 어떤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 논란을 불러온 국정원 대선 댓글 수사를 방해하려는 청와대와 호흡을 맞춰 불법적 경로로 입수한 개인정보를 공개해 검찰총장을 끌어내린 언론사, 세월호 사건의 화살이 청와대를 향할 때 구원파라는 자극적인 희생양을 발굴해 유병언 일가에게 책임을 떠넘긴 세력, 십상시 문건으로 비선실세 국정농단 실태의 일각이 드러났을 때 프레임 전환을 통해 문건유출자 색출로 마무리했던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이 한번도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타락한 정권을 감싸기 바빴던 그들은 이제 정권이 바뀌자 ‘촛불 청구서’라는 해괴한 조어로 비주류 세력을 조롱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증오의 언어로 비주류 세력을 경멸한다는 점에서 소설 속 백인들처럼 미성숙한 사회의 주류라고 자백하는 꼴이다. 이들이 희생양으로 삼는 한국 사회의 앵무새는 전교조와 민주노총, 통진당 등이다. 이들의 지침에 따르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정당하고, 민주노총의 가두시위는 합법 여부와 무관하게 늘 꼴불견이며, 통진당 해산의 법리적 결함을 지적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부적격이다. 이른바 ‘공안 마피아’의 세계관이다. 검찰·재벌 개혁 등 대선 과정에서 주요 후보들이 동의한 적폐 청산에도 딴지를 걸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이들의 태도는 자못 공격적이다. 이들의 자신감 역시 미국 남부 백인들처럼 물리적 근거가 있다. 이들은 여전히 이 나라의 중추 조직-정치·경제·법조·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주류이기 때문이다.
87년 6월항쟁 이후 30년을 10년 단위로 쪼개보면, 보수(노태우·김영삼)-진보(김대중·노무현)-보수(이명박·박근혜)가 번갈아가며 집권했음을 알 수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진보가 집권했는데, 70년 만에 이 나라의 주류를 교체할 수 있는 기회다. 박근혜라는 쓰나미가 해묵은 지역감정과 철 지난 색깔론 등을 한꺼번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의를 현저히 왜곡하는 선거제도를 개혁해 의회권력부터 바꿔야 한다. 더 다양한 진보와 더 많은 소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일단 정치 지형만 바뀌더라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1987년 체제를 대체할 2017년 체제의 진정한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