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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기억을 선택하는 세계 / 손아람

등록 2017-07-05 18:42수정 2017-07-05 20:54

손아람
작가

2400원을 미납하여 해고된 버스노동자의 사연에 분노하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트위트 아래 댓글이 붙었다. “9년을 찍소리 못 하고 지내고… 국민들 눈을 어지럽히고 있네요” 김진숙은 발끈했다. “누가 9년을 찍소리 못 해요?” 이명박 정권 시절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희망퇴직을 막고자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 항의했다. 트위터로 찍소리 낼 수 없던 밤이 있었다면 그의 스마트폰 배터리가 암흑 속의 고공에서 방전되어 있었을 터. 한진중공업에 맞선 김진숙의 전쟁은 지금부터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박근혜 정권 때는 이곳에 천막 설치 투쟁할 엄두가 안 났나? 총 맞을까 봐?” 광화문 앞 천막 투쟁 사진이 페이스북을 한참 떠돌며 비난받았을 때는,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가 나서서 설명해야 했다. 사진 속 풍경이 박근혜 정권 때 것임을. 지난 6월 민주노총의 총파업 집회는 만만한 정부에 딴지걸기라고 비난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린 촛불 집회가 민주노총이 주도한 민중총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깨끗이 지워졌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집회 주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확정받고 수감 중이다.

구글에서는 ‘노빠신문’이란 단어를 포함한 58만개의 문서가 검색된다. 진보언론들은 지금과는 반대로 ‘노빠신문’ 혐의에 변명하기 바빴다. 검색 최상단 문서는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6월29일자 <오마이뉴스>의 기사다. ‘노빠신문’이라는 비판은 시민미디어가 감내해야 할 즐거운 비판이라는 내용이다. 2004년 1월29일 <미디어오늘> 기사는 <한겨레>의 여당 편파보도 논조가 비난받은 일을 다룬다. “한겨레와 열린우리당의 커넥션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한겨레> 기자는 “내부 게시판에 있는 그대로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정말로 진보 매체들은 ‘노빠언론’이었나? 그렇진 않았다. 기억과 망각은 예나 지금이나 선택된다.

하종강 교수는 악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적대성을 쉽게 드러낸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들의 삶과 기억은 아름다운 장소, 좋은 사람들, 행복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의견을 보태자면 완강하게 보수적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낙관적이며 합리적이다. 올바른 세상을 원하되, 경험에 의존한 증명을 신뢰하고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논증을 경계한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기업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기업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위협은 쉽게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의 우경화는 복지 제도의 영구적 실패를 뜻한다. 경제 제도의 좌우 진동 리듬은 기억 이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개발자본으로 높아진 소득 수준에 감사하는 제3세계 주민들은 자본주의의 효과적 작동을 증명한다. 관광객의 여행 동선은 개발자본에 터전을 빼앗긴 채 밀려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도록 짜이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한 영웅의 일화에서 희망을 엿본다. 빈손에서 빈손으로 끝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은 쉽다. 행복으로 가득한 기억 안에 머무는 삶. 그 행복은 개인적 성취이거나, 부유한 생활이거나, 지지 세력의 정치적 안정일 수도 있다. 그러려면 먼저 타인의 불행과 불평을 기억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정이 앞서야만 한다. 그것은 낭떠러지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 모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 모형은 스스로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리는 불가항력의 사건이 덮쳐오는 순간에 예외 없이 금이 간다. 질문. 나의 기억을 선택하면, 나의 추락도 철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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