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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라디오

등록 2017-08-02 18:25수정 2017-08-02 20:53

전우용
역사학자

아기는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들은 다음에야 말하는 법을 깨친다.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기 전에 ‘말 듣는 동물’이다. “말 좀 들어라”는 “시키는 대로 좀 해라”와 같은 뜻이며, ‘말 잘 듣는 사람’은 귀 밝은 사람이 아니라 순종적인 사람이다. ‘듣기 싫은 말을 참고 듣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안 하는 것’은 인간이 생존본능처럼 익혀온 습성이다. 인내의 정도와 빈도는 대체로 권력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어느 집단이나 두 부류로 나뉜다. 아무 때나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는 사람과 허락을 얻은 뒤에야 조심스레 말할 수 있는 사람.

권력은 출현 당시부터 한 사람의 말을 모든 사람, 또는 수많은 사람이 듣게 하려는 의지와 결합되어 있었다. 권력은 이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통신수단을 개발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면 본뜻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이 난제를 해결한 것이 전파(電波)였다.

1896년, 스물한 살 된 이탈리아 청년 마르코니는 2.4㎞ 떨어진 곳에 전선 없이 전기신호를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전기와 음성을 상호 변환하는 기술은 1876년에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190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캐나다인 페슨든은 자기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 보내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었다.

1926년 11월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 1월부터 소리를 전파에 실어 송출하기 시작했다. ‘죄수를 풀어준다’는 뜻의 ‘방송’이 ‘전파를 내보낸다’는 뜻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라디오는 처음부터 권력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신기 앞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듣기 좋은 음악을 섞어 방송했다. 하지만 들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듣는 사람 맘이었다. 티브이(TV)의 등장으로 곧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라디오 소리는 여전히 많은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도 되는 상황이, 말에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힐링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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