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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난’ 의 ‘꿈’ 마저 빼앗는 사회

등록 2005-11-17 18:16수정 2005-11-17 18:16

권태호 경제부 기자
권태호 경제부 기자
아침햇발
# 풍경. 지난 15일, 과천 정부청사 브리핑룸.

한 신문사 기자가 거듭 물었다. “2천만원 넘는 사람이 이것밖에 안 돼요?” 재정경제부가 낸 자료에 근로자(월급쟁이)의 50.7%는 세금을 안 낸다고 돼 있다. 연봉이 2천만원도 안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김용민 세제실장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고액 연봉자다. 좋은 대학 나오고, 서울 살고, 괜찮은 직장 다니면서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다 월급 많이 받는 걸로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 그렇게 많지 않다.”

# 회상. 1994년 추석.

수습을 막 뗀 햇병아리 기자였다. 지존파 사건이 터졌다. 사건현장인 전남 영광에 갔다. 지하감옥, 주검을 태운 화덕, 주검 발굴현장까지 쫓아다녔다. 두목 김기환(당시 26살)의 어머니 집을 찾았다. 비어 있었다. 야트막한 담장을 넘어 방안까지 들어갔다. 다락에 놓인 보퉁이 하나 눈에 띄었다. 풀어봤다. ‘후두둑’하고 앞섶에 떨어진 건 상장, 반장 임명장. 줄곧 1등만 했건만, 돈 때문에 중학교도 못 마친 아들의 상장을 홀어머니는 그토록 아프게 지녀왔다. 부산 신발공장에 다니며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편지 쓰고, 십몇만원 월급 쪼개 어머니께 부쳤다. 어느날, 회사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술 먹고, 잠만 잤다. 이유는 모른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최근 신문을 보다 멍해진 적이 많았다. 엄마 아빠 이혼한 뒤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지내다 개에게 물려죽은 9살, 엄마 공장 야근간 사이 집에 불이 나 죽은 4살·2살, 보험금 때문에 엄마가 건넨 독극물 요구르트 먹고 죽은 9살.

가난은 참 태연하기도 하다. 다 같이 못살던 50~60년대, ‘꿈’이 있던 70~80년대, 가난은 <육남매>나 <옥이이모> 부류의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흑백 추억이 되기도 했는데. 그러나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꿈이 떠나면 가난은 사람을 안으로부터 허물어 뜨린다. 그 ‘꿈’은 버린 것인가, 빼앗긴 것인가? 꿈을 잃어버린 가난은 무섭다.

통계청 데이터베이스로 2003년과 2005년의 가계소득 증가율을 보면, 소득이 가장 낮은 하위 20%인 1분위는 7.9%, 상위 20%인 5분위는 10.9%였다. 빈익빈 부익부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1분위는 근로소득은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6.2%)에도 못 미치는 4.7%만 늘었고, 이전소득이 30.5% 대폭 늘었다. 정부 복지 혜택 또는 이웃 친지들로부터 받는 도움이 없다면 쓰러지기 직전인 상황이다.

정부는 투자·소비를 통해 양극화를 해결하려 한다. 보자. 삼성전자가 투자를 늘린다, 고용이 는다, 임금이 오른다, 소비가 는다, 수요창출로 투자가 또 늘어난다. 선순환 구조다. 그러나 이때 늘어나는 고용·임금·소비는 주로 대기업 직원의 것이다. 그들의 수요도 삼성 같은 대기업 제품에 집중된다. 선순환은 ‘윗물’에서만 이뤄진다. 그러니 ‘잘사는 사람이 써줘야, 못사는 사람도 먹고산다’(트리클 다운)는 말도 점점 공허해진다. ‘윗물’과 ‘아랫물’을 터주는 작업이 병행하지 않으면 1분위 상황은 달라질 게 없다. 1분위 월평균 가구소득은 82만원이다. 연봉기준 1천만원도 안 된다. 우리네 이웃 5명 중 1명이 이렇게 산다. ‘꿈’이 더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세금 한푼 더 낼까봐 득달같이 달려들면, ‘작은 꿈’이 둥지 틀 곳은 없다.


권태호 경제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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