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급격하게 바뀌는 서울의 생김새를 보면서 그런 문명화란 오히려 야만성의 심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지금 낙원상가 일대에서 진행 중인 도시재생사업으로 거기 자생적으로 들어선 게이 술집 등이 ‘불순하다’며 철거된다고 한다. 쫓겨나는 다수에게 그런 곳은 아무리 멋있어도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 도시는 이미지로 읽힌다는 말이 있다. 도시, 특히 서울 같은 대도시는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 특징을 알기가 어렵다. 도시에 대해 우리가 지닌 이미지는 그래서 대개 부분적이다. 게다가 그런 이미지도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골목이나 전철역, 거리, 광장을 오래 쏘다니며 쌓은 기억이 있어야 도시에 대한 심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시골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산 지 벌써 반백년이나 되니 나도 서울에 대한 개인적 이미지가 많다. 완행열차 타고 처음 서울역에 내린 뒤 본 대도시는 너무 낯설었다. 이면 도로에 주차된 승용차 모습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보면 분명 아주 작겠지만 그때 부감으로 내려다본 자가용들은 참 길고 미끈하게 보였다. 당시 내 모습이 어리바리했다면 새로운 공간 환경이 갑자기 무더기로 제공한 그런 수직 시각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비좁은 버스에서 바로 옆 사람과 말을 나누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그때는 너무 이상했다. 물론 나도 이제는 고향에 가면 ‘서울 사람’으로 불리는 도회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도시는 여전히 낯설며, 나의 서툰 도시 관상학은 그 모습과 특징, 생김새를 잘 잡아내지 못한다. 최근 ‘도시형태론’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는 것을 알고 관련된 글을 읽어보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서울의 생김새와 그에 대한 이미지의 관계를 이해하고 둘 사이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은 생각이 요즘 부쩍 늘어났다. 오늘날 도시 생김새의 주된 특징으로는 시각적인 수직 상승 운동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옛날에도 그런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 주변에 삼사층짜리밖에 없는 관철동에 들어선 삼일빌딩은 31층에 110m로 지어져 위용이 참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건물도 최근 들어선 초고층 건물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올 초에 개장한 롯데월드타워는 123층에 555m나 되니 서울 시민이 거의 매일 보는 남산 높이의 두 배가 넘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은 육삼빌딩 하나 정도였으나 지금은 스물한 개에 이르며, 한국은 이제 40층 이상 건물의 수가 중국, 미국,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하늘 높이 치솟는 건물들은 우리를 천상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만 같다. 중국 시인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우화등선’, 즉 날개가 돋아 하늘 나는 신선의 느낌을 말했는데, 마천루에서 살아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주상복합 건물이나 초고층 아파트를 선호하는 부자들은 필시 그런 느낌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초고층 건물이 늘어나는 것을 문명과 문화의 발전으로 여길 공산이 크다. 하지만 급격하게 바뀌는 서울의 생김새를 보면서 그런 문명화란 오히려 야만성의 심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서울에는 지금 재개발과 재건축이 진행되는 곳이 많다. 도시재생으로 불리든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불리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도시는 생김새가 말끔해진다. 불편하거나 더럽거나 불순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죄다 제거되기 때문이다. 지금 낙원상가 일대에서 진행 중인 도시재생사업으로 거기 자생적으로 들어선 게이 술집 등이 ‘불순하다’며 철거된다는 소식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 다른 곳에서도 꾀죄죄하고 복작거리지만 정감 있는 골목들이 수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정치의 심미화’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80여년 전 발터 베냐민은 “대중이 없애려는 소유구조”, 즉 대중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는 그대로 두고 대중이 “스스로 표현할 기회”만 갖게 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 파시즘의 능사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에서 사람들을 아리안 우월주의에 심취시키고 군중대회, 페스티벌에 자주 참석하게 한 것은 사회적 문제를 문화적으로 해소한 것과 비슷하다.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재생이 전개되면 도시는 치장을 하게 되고 맵시가 나서 가치 상승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축출당하는 사람도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서울의 생김새를 말끔하게 하는 것은 도시를 유토피아로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쫓겨나는 다수에게 그런 곳은 아무리 멋있어도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 가짜 유토피아 퇴치를 위해 베냐민이 내린 처방은 정치를 심미화하는 예술을 다시 정치화하는 것이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