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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전화밖에 할 수 없는 불효자 / 권혁철

등록 2017-10-29 19:04수정 2017-10-29 19:25

권혁철
사회2 에디터

지난 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권고’를 발표하는 순간, 나는 고향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 고향은 울산이다. 울산에는 여든이 넘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신다.

지금은 울산광역시지만 내가 초중고를 다닐 때는 경상남도 울산시였다. 20살 때 서울에 왔더니 울산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경북 포항과 울산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부산·울산 쪽에 연고가 있는 사람을 빼면 울산 위치를 모르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해도 담양과 장성이 전남에 있다는 것만 알지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운전을 하기 시작하자 나는 울산 위치를 이렇게 설명해줬다. “동해를 따라 7번 국도를 운전해 내려오면 포항-경주-울산-부산이 나온다.”

지난 추석 연휴 때 부모님을 모시고 간절곶 나들이를 갔다. 내비게이션은 울산 고향 집에서 간절곶까지 거리가 25㎞라고 알려줬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가니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온산공업단지, 그리고 고리원전이 나왔다. 울산 집에서 고리원전까지는 20㎞ 거리였다. 고향 근처에 원전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다.

환경운동가들은 7번 국도를 ‘원전 국도’라고 부른다. 울산 남쪽에는 고리원전(6기 가동), 울산 북쪽에는 경주 월성원전(6기 가동)이 있다. 울산은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으로 불린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자료를 보면, 고리원전 30㎞ 안에는 부산·울산·경남 사람 382만명이 산다. 월성원전 30㎞ 안에는 경북·울산 사람 130만명이 산다. 원전 밀집지역 반경 30㎞에 있는 부산, 울산, 경남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은 일상적 현실이다. 그렇지만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권고를 ‘과학이 공포를 이겼다’고 보도한 ‘수도권 언론’은 지역 주민의 불안감은 부차적인 문제로 무시한다. ‘원전 1기도 없이 원전 고집하는 수도권’(<부산일보> 6월21일치 1면 머리기사)에 대해 “그렇게 원전이 안전하다면 서울 한강에 건설하라”고 화를 내는 부산·울산 주민이 꽤 있다.

앞에서 거리 30㎞를 강조하는 것은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이 30㎞이기 때문이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은 방사선 비상 또는 재난이 발생할 경우 주민 보호 등을 위해 대피·소개 등 비상대책을 집중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평상시 설정해 놓은 구역이다.

울산시 누리집의 ‘울산방사능방재계획’을 보니, 방사선 재난 때 주민보호조치는 옥내 대피-소개-갑상샘 방어-일시이주-영구정착 순으로 이뤄진다. 방사선 재난이 발생해 방사선비상계획구역 출입이 통제되면 구역 내 집으로 가지 말고 외부의 친구나 친척 집, 구호소로 대피해야 한다. 그런데 자가용이 없고 무릎과 허리 등이 아파 걷기 힘든 부모님이 집 아닌 다른 곳으로 대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해 9월12일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에서 5.8 규모 지진이 났을 때 고향 동네 이웃들은 물과 비상식량 등을 챙겨 학교 운동장 등으로 대피할 태세를 갖췄지만, 연로한 부모님은 집 밖으로 나올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울산에서 방사선 재난이 일어날 경우 부모님이 할 수 있는 행동요령은 집 장독대와 창문·출입문을 꼭 닫고 방 안에서 텔레비전 재난방송을 시청하는 정도일 것 같다.

그렇다고 고향에서 400㎞ 떨어진 곳에서 사는 내가 단박에 달려가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도 없다. 지난해 9월 지진 때도 나는 ‘무사하시냐’고 연신 안부 전화를 한 게 고작이었다. 나는 불효자였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권고 이후 나는 ‘무사하시냐’고 고향 집에 갑자기 전화할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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