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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조직을 지키는 것과 운동을 지키는 것 / 후지이 다케시

등록 2017-11-12 18:22수정 2017-11-12 19:01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50년 전 11월13일. 일본 도쿄에서 대중적인 베트남 반전운동을 펼치던 시민운동단체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련)이 기자회견을 했다. 요코스카에 정박 중인 미국 항공모함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탈영한 4명의 미군을 무사히 탈출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거부한 미군들의 탈영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미군들의 탈영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주로 베평련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만든 자텍(JATEC, 반전탈영미군원조일본기술위원회)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듬해 4월에도 한국계 미국인 김진수를 비롯한 6명의 탈영 미군을 탈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6월에 3명, 9월에 4명을 스웨덴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미군 쪽에서 탈영병에 대한 수사를 일본 경찰에 요청했기 때문에 탈영병들을 보호하는 작업은 일종의 지하활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며칠씩이라도 숨겨주려는 이들은 많았고, 그 대부분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침략전쟁을 거부해 탈영한 군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이 그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자텍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미군 쪽에서 탈영병을 위장한 스파이를 보낸 것이다. 사실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그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대부분 탈영병들이 불안정하고 규율화가 덜된 모습을 종종 보였던 반면에 그는 안정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존재를 두고 운동 내부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가 스파이라면 같이 탈출해야 할 탈영병이 위험해지고 또 지금까지 그들을 해외로 탈출시켰던 비밀경로가 들통날 수 있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자텍 멤버들은 99% 의심스러워도 1% 진짜 탈영병일 가능성이 있다면 믿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같이 탈출하려던 미군은 체포되었고 10여명을 탈출시킨 경로는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멤버가 누구인지도 경찰에 알려져 자텍 조직은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 그때 책임자로 활동했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30년이 지난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 판단이 옳았다고 말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탈영병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탈영병을 지원하는 운동 자체가 붕괴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조직의 파괴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 조직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사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대중에 대한 불신이다. 원래부터 대체 불가능한 지도자를 만들지 않기로 했던 자텍은 이런 발상을 거부했고, 역설적이게도 조직을 희생시킴으로써 운동을 지켜냈다. 일단 조직은 파괴됐지만 몇 달 뒤 다른 이들에 의해 자텍이 재건되었고, 기관지를 내는 등 오히려 더욱 운동을 공개적으로 펼치면서 탈영병 지원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자텍을 지원해 달라고 하지 않고 알아서 자텍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자텍이 생겨서 미군기지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직의 파괴는 오히려 운동의 확산을 낳았다.

자텍의 경험은 조직의 파괴가 운동의 끝이 아니며 조직을 지키려는 행위가 오히려 운동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촛불 1년을 지난 지금, 자텍이 보여준 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조직이란 무엇인지, 또 운동의 지속이란 어떤 것인지 한번 근본적으로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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