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01 19:42 수정 : 2005.02.01 19:42

지금 한창 ‘광화문’현판 교체 방침을 두고 말들이 많다.

정조대왕의 글씨로 교체할 수도 있다는데 우선 고궁과 어울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시급히 복원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덕수궁과 대한문이다.

대안문(大安門)이 1906년 6월 대한문(大漢門)으로, 경운궁(慶運宮)이 1907년 7월 덕수궁(德壽宮)으로 각각 개칭된 동기와 목적이 우리쪽 의사에 반할 뿐 아니라 고종 황제를 능멸하고 민족의 자존심까지 깡그리 짓밟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연인 즉 이렇다. 1895년 8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은 안전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지내다 이듬해 그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다시 옮긴다. 1897년 10월 고종이 지금 조선호텔 자리에 ‘원구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세계만방에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원구단과 대한제국 황제가 머무는 경운궁을 잇는 통천로를 만들어 황제가 하늘과 바로 통함을 표징한다. 이때 경운궁 모서리 돌담을 헐어 문을 세우니 그것이 대안문(大安門)이다. 나라는 태평스럽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국태민안’이란 뜻을 담은 것이다.

한편 러일전쟁(1904~1905)까지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총검을 앞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그해 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1907년 7월 고종 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이에 격노한 이토 통감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동월 17일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으로 그 뒤를 잇게 했다.

우리가 풀어야 할 흑막이 을사늑약, 이토 통감 부임, 헤이그 밀사사건 등에 숨어 있다. 1904년 4월 고종이 계시는 경운궁에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토 통감은 1906년 6월 능청스럽게 그 화재로 불탄 궁궐을 복구한답시고 ‘선심’을 썼고, 주권을 빼앗긴 고종황제는 와신상담, 기회를 엿보면서, 근왕병(의병)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해외 밀사파견을 추진하였다. 이토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고종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한 것이다. 차마 악한 괴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파렴치‘한’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 ‘놈 漢’자를 넣어 “큰놈이 사는 대궐문”이라는 뜻이 담긴 지금의 “大漢門”으로 개악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있는가? 없다.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토 통감 때의 일이고, ‘고종순종실록’은 총독부 아래 ‘이왕직’을 설치한 후 1927년부터 35년 3월까지 편찬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 시노다가 총괄 지휘하고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가 책임 감수하는 판에 그들이 어찌 무소불위 전횡을 일삼은 이토의 비행을 낱낱이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필자가 위 명칭 개악을 입증할 사료를 대지 못하고 정황 증거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웃나라 중국 ‘천안문’의 예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궐문에서 떼어낸 유물번호 926호 ‘大安門’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덕수궁은 어떤가? 황제에서 물러난 고종이 “건강하고 오래 사시라(德壽)”는 뜻으로 개칭했다고 하나, 그를 강제 폐위시키고 아들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겨 부자의 인연도 끊게 하면서 황태자 이은마저 볼모로 일본으로 잡아간 마당이니 말이 ‘덕수’지 실제로는 경로당 정도로 격하된 것이다.

하물며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 그곳에 유폐·격리시켰고 그 사인조차 독살설이 나도는 판에 이곳은 결국 ‘덕수’라는 뜻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이다.

이 치욕을 언제까지 더 두고 볼 것인가? 통감부, 총독부 망령과 기고만장한 일본인 등이 쾌재를 부를 일이다.

정준영/역사교훈실천시민운동연합 대표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