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사건이 터진다. 피해가 발생한다.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심을 토대로 피해자가 구제되고 관련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진다. 인권현장 공식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다.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사회적 관심이 다르다. 옹호자인 내게도 피해자가 누구인가는 중요하다. 피해자와 협력이 잘될수록 이야기의 힘은 세지고 공감하는 사람은 늘어난다.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들의 비명과 절규를 외면한다면 누구라도 똑같은 경우를 당할 수 있다. 이들이 울리는 신호를 외면하지 말자. 이들이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이끈다. 이렇게. 피해자로 만났던 A는 종종 시험에 들게 했다. 두말할 것 없는 인권침해였지만 A는 자주 말을 바꿨고 살아온 삶은 그를 변호하지 못했다. A를 앞세우면 되던 일도 안 될 판이었다. 사건은 명료했지만 해결은 미궁으로 빠져갔다. 동료도 A에 대한 감정이 비슷했다.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을 던졌다.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든 피해자는 피해자니까.”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후 ‘피해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하게 되었다. 피해자가 매력적이어야만 되는가. 그가 당한 일만으로도 이미 위험신호 아닌가.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복잡다단한 특성이 피해자에게만 예외일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 유민아빠에게 가해진 모함과 폭력도 기억난다. ‘이혼한 아빠이며 자식들에게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그를 공격했다. 결국 아빠는 아이들과 나눈 문자 대화와 용돈 통장을 공개했다. 어떤 엄마는 집 떠나 있다 아이 소식을 들었을 수 있다. 어떤 자식은 평생 속만 썩이다 부모의 비참을 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은 유가족으로 눈물 흘려선 안 되고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면 안 되는가. 지고지순하며 순결한 이미지의 희생자가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되어도 괜찮은가. 그걸 잘 아는 정부는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데 앞장섰다. 세월호의 박근혜가 그랬고 용산참사의 이명박이 그랬다. 밀양과 강정에서 ‘외부세력’ 개입을 운운한 이유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을 특정한 목표와 의도를 가진 괴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작전에 속했다.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는 재개발 과정의 인권침해와 경찰 과잉진압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농성자들이 도심 게릴라들이며 배후엔 철거민 조직이 있으며 발화 원인은 화염병이라 발표했다. 공권력에 분노했던 시민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철거민들을 향했다. 도시 빈민들끼리 나눈 연대는 사전 모의와 범죄 공모가 되었다. 그렇게 결말을 정하고 달려간 수사와 재판이 끝날 때쯤 그들은 ‘공동정범’이 되어 있었다. 과잉진압 가해자인 경찰 중 단 한명도 범인이 되지 않은 9년 동안 ‘공동정범’들의 삶은 고달팠다. 원망과 미움은 가까운 피해자들끼리 나누기에 더 편했고 화염병이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은 벗어지지 않았다. 감옥 바깥의 가난과 절망은 이전보다 덜하지 않았다. 철거민 농성자들을 괴물이라 단정하고 지시한 정부의 목적이 관철된 탓이었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으며 왜 죄인이 되었는가? 피해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안기는 동안 사회는 나아졌는가?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생명을 삼켜버린 참사 뒤 9년 동안 더 완고해진 가진 자들의 카르텔. 그들을 피해자로 호명하는 이유는 그들이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서도 아니고 괜찮은 사람들이어서도 아니다. 개봉을 앞둔 연분홍치마의 영화 <공동정범>은 묻는다. 그래서 “피해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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