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2 에디터 얼마 전 대학생 아들이 영화 <1987>을 보고 와서 “만약 제가 87년에 대학 신입생이었다면 시위에 참여했을까, 아니면 외면했을까요”라고 한 뒤 “그때 아빠는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런 고민을 너희 세대는 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며 그냥 웃고 말았다. <1987>에 나온 87학번 신입생 연희(김태리)처럼 나도 87학번 신입생이었다. 31년 전인 1987년의 기억은 생생하다. 몸으로 기억할 일이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1987년 2월7일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 국민추모대회가 열렸다. 2월7일은 내가 합격한 대학의 신입생 예비소집일이었다. 이날 스크럼을 짠 시위대가 학교 밖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쏘며 막는 전경들과 충돌하는 ‘교문 박치기’가 벌어졌다. 첫발을 디딘 대학 교정 바닥은 돌멩이와 최루탄투성이였다. 입학식 다음날인 3월3일은 박종철 열사 49재였다. 학생회관 근처에는 향 냄새가 자욱하게 깔렸다. 학교가 아니라 초상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내 추모제를 마치고 정문 앞으로 몰려간 학생들은 전경들과 대치했다. 나는 이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며 ‘앞으로 대학생활이 만만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대로 나는 87년 봄과 여름 학생회관에서 밤을 새워 유인물을 롤러로 밀어 등사하고 낮에는 학교 안팎 집회와 시위에 참석했다. 나는 <1987>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줄거리는 물론 주요 대사도 알고 있다. 각종 매체의 기사와 페이스북 친구들이 페북에 쓴 영화 후기들 덕분이다. 나는 앞으로도 <1987>을 보지 않을 것 같다. 1987년, 그 시절을 뒤돌아볼 자신이 없다. 특히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는 영화 속 연희의 대사를 직접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나를 담당했던 안기부 직원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비웃었고, 나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고 맞섰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바뀔 판이다. 마흔 넘어서는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정해진 길 위를 안전하게 걷는 것, 그것이 가장 실용적으로 사는 방법’(손원평 소설 <서른의 반격>)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쉰살이 넘어서부터는 ‘정해진 길 위를 안전하게 걷기도 버겁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는 사람 중에 많이 아프거나 일터를 타의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1987>을 보지 않으려는 다른 이유는 내 또래가 87년을 기억하는 방식이 불편해서였다. 상당수 86세대는 87년을 쓰레기통에 처박거나 액자에 넣어 두고 훈장처럼 자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1987>이 인기를 끌면서 86세대 페이스북엔 각종 후일담과 무용담이 무성하다. <1987> 포스터도 `모두가 뜨거웠던 그해’라고 홍보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1987년 봄과 여름에 모두가 뜨겁진 않았다. 그 시절에도 대학가 디스코텍은 붐볐고, 87년 봄과 여름에도 대학 도서관에 있는 학생이 학내외 집회·시위에 참여한 학생보다 훨씬 많았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뜨거웠던’ 그해 만 20살 나이로 사법시험에 이른바 ‘소년급제’했다. 요즘 돌이켜보면 87년에 실제 모든 사람이 뜨겁지 않았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이 뜨거워야 했느냐’는 의문도 든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란 연희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나는 <1987>을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진 87년의 기억을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꽃다지’ 가사)고 간직해 두려고 한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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