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잡스럽다는 말의 ‘잡’은 순수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대상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말이다. ‘잡것, 잡놈, 잡년’과 같은 말은 아예 사람의 품격을 낮춰 보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순수’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잡’이란 말이 들어가도 그 의미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잡곡’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한다. ‘잡지’에는 이런저런 유익한 정보가 꽤 많다. ‘잡채’나 ‘잡탕’, ‘잡어매운탕’도 이젠 어엿한 메뉴에 속한다. 한때는 ‘잡기’와 ‘잡학’이라는 말에 깔보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도 다 ‘교양’ 속에 들어가 있다. 아직 ‘잡담, 잡소문, 잡음’ 등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잡담 같은 방송프로도 많고 잡소문 전하는 뉴스도 많다. 잡음은 오히려 기계 작동의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음 구실을 한다. ‘잡초’도 환경 보전에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며 ‘잡념’이 새로운 착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잡상인’이라는 말은 잡스러운 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점포 가진 상인들이 고정된 점포를 가지지 못한 상인들을 경계하며 쓰는 말이다. 옛날의 과거시험에는 ‘대과’가 있고 ‘잡과’가 있었다. 대과는 요즘 말하는 인문학에 가까운 분야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잡과는 공학이나 의학 같은 기술직이었고 신분이 낮았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분야가 대세가 되었다. 요즘 어느 인문학도가 감히 공학과 의학을 잡과라 하겠는가? 그저 ‘문송합니다’ 하고 뒷전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시대 아닌가. 잡된 것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다양한 가치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낡은 것도 새로워질 수 있고 작은 것도 더 커질 수 있는, 기회가 넉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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