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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등기권리증

등록 2018-04-18 18:28수정 2018-04-18 19:42

전우용
역사학자

을사늑약 직후 서울 시전(市廛) 상인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대대로 물려받았거나 선조 대에 큰돈 주고 산 점포 터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것이 첫째 문제였다. 조선 건국 직후 한양으로 천도한 왕조 정부는 새로 수도(首都) 주민이 된 사람들에게 집 지을 땅을 거저 나눠 주었다. 태종부터 성종 대에 걸쳐서는 종로와 남대문로 양측에 행랑을 짓고 그 대부분을 상인들에게 내주어 점포로 사용하게 했다. 시전에 화재가 발생하면 나랏돈으로 복구하기도 했다.

시전의 내력이 이랬으니, 이를 온전한 사유(私有)라고 주장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시전 상인들에게는 다행하게도, 일본은 대로변 한국인 점포를 다 몰수해서 얻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상인들을 다독여서 얻는 정치적 이익이 더 크리라고 판단했다.

1888년께, 조선 해관(海關) 직원으로 온 영국인 핼리팩스가 부산에서 집을 한 채 매입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집문서에는 건물의 칸(間)수만 기재되었을 뿐 대지(垈地) 평수는 누락되어 있었다. 그는 대지를 정확히 표시한 문서를 발급해달라고 요구했고, 부산항 감리서는 대충 그림을 그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건물과 농토에 대한 소유 관념은 명료했으나 집터에 관한 생각은 모호했다. 보천지하막비왕토(普天之下莫非王土), 즉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 없다’라는 유교적 토지 공(公)개념이 모든 땅에서 사유권 개념과 공존했으며, 대지에서는 특히 더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인의 소유권을 명료히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1906년 한국 정부로 하여금 ‘토지가옥증명규칙’을 제정하도록 했다. 이로써 이른바 ‘근대적 등기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꽤 오랜 세월에 걸쳐 집문서는 ‘등기권리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개인 사이의 거래를 국가가 인증하는 것은 이미 그 물건에 ‘공’(公)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을 사람이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수천년간 토지 공개념을 갖고 살았으면서도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법으로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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