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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폭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 김은형

등록 2018-05-30 18:04수정 2018-05-30 19:30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지난주 발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한빙상경기연맹 특정감사 결과는 감사가 시작될 때의 뜨거웠던 논란에 비하면 맥 빠질 정도로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선영 선수 ‘왕따’ 논란에 별다른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 탓이다. 그럼에도 감사 결과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코치의 심석희 폭행사건 전말이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코치에게 ‘손찌검’을 당해 선수촌을 이탈했다가 이틀 뒤 복귀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던 심석희 선수는 연습 중에 투덜거렸다는 이유로 코치에게 주먹과 발로 수십차례 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결과 뇌진탕과 염좌로 전치 3주의 병원 진단이 나왔다. 게다가 일회성 폭력이 아니라 이번 감사에서만 추가적으로 드러난 폭력이 2회 더 있었다. 가해자인 조아무개 코치는 스무살인 심석희 선수를 14년 전 발굴해 지금까지 키워온 인물이다. 이 세월을 고려하면 그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 많은 구타가 있었을지 가늠이 어렵지 않다. 이런 사실이 빙상연맹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었음은 뻔한 이치다.

문제의 코치는 자격정지뿐 아니라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어쩐지 사건의 종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의문부호는 머리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물리적인 가해자를 처벌하면 이 폭력의 악습이 과연 끊길 수 있을까.

심석희 코치 사건의 전개를 보면서 마치 거울상처럼 영화 <4등>(2016)이 떠올랐다. 대회에 나가면 늘 4등만 하는 초등생 수영선수 준호는 자신보다 애달파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용한’ 코치를 찾아간다. 그 코치가 아이의 기록을 단축시키는 ‘비법’은 다름 아닌 폭력이다. 코치는 아이의 속도가 처질 때도, 시키는 영법을 제대로 못할 때도, 말대답을 할 때도 대걸레 회초리를 든다. 그는 늘 말한다. “나는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라 집중을 안 하고 열심히 안 하는 게 안타까워서 때리는 것”이라고.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심석희의 코치도, 그 전에도 잊을 만하면 일어났던 스포츠계 폭행사건의 가해자들도,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얼차려를 주는 예체능 학과 선배들도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나.

영화에서 엄마는 아이 몸에 새겨진 피멍을 외면한다. “아이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섭기” 때문이다. 언뜻 충격적인 것 같은 이 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평범한 엄마의 자식사랑이 담겨 있을 뿐이다. 4등이 두려운 건 메달 없이 대학 가기 힘들고 대학을 못 가면 안정된 진로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그 가능성이 사라지면 인생은 나락이다. 어디서 많이 본 논리 아닌가.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아이가 뒤처지면 실패한다는 두려움은 <4등>의 엄마가 그랬듯 폭력에 대한 방조를 이끌고 더 나아가 코치처럼 폭력에 대한 명분까지 만들게 된다. 그렇게 완성된 “너 잘되라고”의 명분은 다음 세대로 폭력을 유전한다.

가족공동체의 문제를 짚은 <이상한 정상가족>에는 체벌의 본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부모 체벌을 금지하는 스웨덴이 우리나라처럼 ‘사랑의 매’를 용인하던 시절, 한 엄마가 잘못한 아이에게 회초리를 구해 오라고 시키자 한참 뒤 아이는 울면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아이는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못 구했다며, 대신 자신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명분으로 포장을 해도 체벌은 굴욕이자 고통일 뿐이다. 존엄의 가장 밑바닥을 헤집는 고문이다. 아이에게 돌을 던지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명분은 세상에 없다. 그런 명분이 있다면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선의일 뿐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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