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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최저임금 주술판의 노동자들 / 조문영

등록 2018-06-06 18:02수정 2018-06-06 19:13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최저임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에 비해 16.4% 인상된 최저임금(7530원)의 효과를 둘러싸고 언론이 학계부터 정부 부처까지 제 취향에 맞는 전문가들을 적극 동원하고 있다. 과학적 지식과 신화적 지식이 생각만큼 다르지 않다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시각에서 보자면, 현대판 주술의 퍼포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술가들처럼, 지식을 독점하고 배분하는 권위를 부여받은 전문가들은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자본과 노동의 복잡한 연쇄에서 ‘최저임금’이라는 장치만 떼어 무대를 만들고, 영세 자영업자와 실직자, 알바 노동자들을 전면에 배치하여 한판 싸움을 붙인다. 이 무대를 합리화하기 위해 영험한 약초 대신 각종 통계가 동원된다. 효험을 둘러싼 ‘팩트’ 경쟁도 치열하다. 노동연구원이 통계청에 밀리고, 뒤늦게 등장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더 인정을 받는 모양새다.

얼마 전 중국에서는 주술가들이 노동계약법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노동시장 구조 변화와 급증하는 분규에 대응하기 위해 2008년에 제정된 이 법은 시장개방 이후의 불평등이 체제 안전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법안은 파견근로를 폭넓게 허용하는 한편, 사회보험에 대한 사용자 분담을 명확히 함으로써 저임금 관행에 익숙한 기업들에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그로부터 10년간 법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기업이 일부 경제학자들을 앞세워 불만을 표출하더니, 경제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정부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재정부 부장이 현행 법안에 대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저해하고 기업의 고용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초안까지 작성된 개정 작업은 2017년 공산당 19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현행 노동법이 기업 비용을 무리하게 인상시켰다는 증거가 없다며 당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연세대 중국연구원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인민대 법학원 린자 교수는 당대회에서 강조된 ‘당과 인민의 관계’를 중단의 배경으로 언급했다. 개혁의 성과가 전체 인민에게 더욱 공평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당의 총서기가 직접 주장한 마당에 친기업적인 개정을 단행하기란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기업의 이익을 변호하는 입장은 더 거세질 테지만, 사회주의 중국의 “주류 계급”인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히 강력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주술사의 서열은 확실해 보인다. 노동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당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다. 반면 한국에선 주술사들이 꽤나 다채롭다. 제도화된 민주주의를 거치면서 정부와 정당, 시민사회, 언론, 심지어 기업이 노동자의 동반자 역할을 자임하는 시대가 되었다. 여러 집단이 득실을 셈하면서 노동자를 ‘시민’이나 ‘국민’으로 통합하고, 상생이 최선의 해법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왔다. 하지만 최근의 최저임금 논쟁을 보면 역사상 한번도 “주류 계급”이었던 적이 없는 이들이 자신을 변호하는 이름이란 결국엔 ‘노동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복리후생비와 매달 지급되는 상여금을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시킨 황당한 개정안에도 냉소의 댓글이 넘쳐난다. 최저임금 인상을 노동자의 ‘갑질’인 양 호도하는 여론몰이도 심상찮다. 하지만 대다수의 삶이 힘들고 불안정하다 해서 누구나 굴뚝에 올라가고, 폭염에 시위를 벌이진 않는다. 알바든 공장노동이든 돌봄노동이든 요란한 주술에 맨몸으로 발악하고 악다구니를 퍼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이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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