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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기성복

등록 2018-07-04 18:32수정 2018-07-05 09:35

전우용
역사학자

‘같다’의 반대말은 ‘다르다’이고, ‘옳다’의 반대말은 ‘그르다’이며, ‘맞다’의 반대말은 ‘틀리다’이다. ‘옳고 그름’은 가치관이 개입된 판단이며, ‘맞고 틀림’은 수치나 규격 등 탈가치적인 정밀도와 근사치에 대한 판단이다. 두 물건이나 물질 사이에 쓸모없는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맞춤’이다. 문과 문틀이 서로 맞지 않으면 문이 비틀리기 마련이다. 어깨너비, 가슴, 배, 허리둘레, 키, 앉은키 등에 다 독특한 ‘개성’을 담는 사람 몸에 옷을 맞게 만드는 것도 ‘맞춤’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가 처음 입은 옷은 나뭇잎이었다. 아마존강 유역이나 파푸아뉴기니 등 일부 열대우림 지역에는 아직도 그와 유사한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류가 섬유를 생산한 이래, 옷은 대체로 ‘특정인’에게 맞도록 짓는 물건이었다. 주부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식구들 옷을 짓던 전근대는 물론이고 분업화가 고도로 진전된 근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에게 보이는 겉옷은 맞춰 입어야 했다.

다만 속옷과 신축성 있는 옷은 일찌감치 미리 만들어져 시장에 나왔고, 군복이나 교복 등의 제복과 작업복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나라에서 ‘격식을 갖춘 겉옷’이 ‘기성복’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께부터다. 그런데 아무래도 기성복은 몸에 꼭 맞기 어려워, ‘얻어 입은 것 같다’는 평을 듣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기성복 시장이 본격 형성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다. 1975년 한국 소비자들의 기성복 구입 실태를 조사한 한 광고회사는 이 시기 기성복 시장이 급성장한 이유로 오일쇼크에 의한 물가 상승과 불경기, 기성복 제조사들의 선전 활동 강화 등을 꼽았다. 당시 기성복 착용 ‘경험’이 있는 성인은 54%였다. 기성복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치수 사이의 간격은 촘촘해졌다. 기성복 제조사들은 또 댄디, 맥그리거, 라보레 등 ‘탈국적’ 브랜드를 만드는 데에도 앞장섰다.

현대인은 이미 만들어진 옷 중에서 제 몸에 ‘맞는’ 것을 고르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다. 같음과 다름,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는 의지가 줄어들고 제 맘에 맞고 틀림만 따지는 태도가 일반화한 데에, 기성복 입는 습관이 미친 영향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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