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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헌법과 망상 노트 / 김남일

등록 2018-07-10 18:48수정 2018-07-10 18:57

김남일
법조팀장

팬데믹이 온다면 그 시작은 남자화장실일 거라 생각한다. 크고 작은 내밀한 행위 뒤 손 안 씻고 세상으로 나서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전지구적 전염병 대유행 출발점으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미지의 영역인 여자화장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면 팬데믹 출현 가능성은 기하급수로 커질 것이다. 인류 절멸 이유가 소행성 충돌이나 핵전쟁처럼 스케일이 클 필요는 없다.

망상이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손에 손 잡고’를 다 함께 부른 88서울올림픽 때 인류는 이미 망했어야 했다. 나와 가족, 국가, 인류를 위해 누군가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와 공동체 의식이 화장실발 대재앙을 30년째 막고 있는 것일까.

“최근까지도 정치인, 기업인, 고위 공직자 등 소위 사회지도층과 그 자녀의 병역기피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점증하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국민들 사이에는 이념·지역·세대 간 갈등이 표출되고 있으며, 장애인학교 설립이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한다. 국민의 공동체의식, 즉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그 공동체의 존립과 안전을 위해 명예롭게 헌신하고 다른 구성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연대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헌법재판관 안창호·조용호 두 사람은 종교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적었다.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의 병역기피가 왜 다른 이들의 병역의무로 둔갑해야 하는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조국의 위기가 그래서 뭐라는 건지, 나라가 망할 판인데 싸움질이나 하는 수준 낮은 국민이라는 얘기인지, 국가를 위해 너의 몸을 초개처럼 던지라는 무식한 전체주의가 언제부터 연대의식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투현장에서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갑자기 생명존중과 평화주의에 기반해 양심상의 결정을 하고 병역의무 이행을 거부하는 경우”에 이르면, 헌법 해석이 화장실발 대재앙류의 망상 노트를 채우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절감한다.

두 콤비는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때도 희대의 문장을 적어 냈다.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문서에 ‘대역’과 ‘불사’라는 사극적 대사가 동시에 쓰인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에서 확인된다. 1498년 사관 김일손 등을 죽인 뒤 이를 종묘사직에 고유한 연산군이 했다는 말인즉,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으로서 논단하여 부관참시를 하였다.” 2004년 조선시대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인용해 ‘수도 서울은 관습헌법’이라고 선언했던 헌재에서, 헌법전 대신 경국대전을 보는 재판관이 있다는 우스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는 9월 이진성(소장), 김이수, 김창종, 안창호, 강일원 재판관이 퇴임한다. 내년 4월에는 조용호, 서기석 재판관이 임기를 마친다. 지난해 임명된 유남석 재판관을 포함하면 문재인 정부에서 재판관 9명 중 8명이 교체되는 셈이다. 보수진영에선 ‘단일 정권에서 최고법원 구성원 대다수를 교체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보수화가 깊어질 때 입 닫고 있던 이들이 주로 이런 목소리를 낸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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