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미국은 종전선언이 북한에만 유리한 의제가 아니라 북한 비핵화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이를 위한 한국 정부의 설득 노력이 중요한 때다. 외교부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도 직접 대미 설득에 나서야 한다. 뜻밖에도 종전선언 문제가 북-미 간 비핵화 논의를 지체시키는 복병으로 등장했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7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직전 평양에서 열린 폼페이오-김영철 회담에서 자신들은 평화체제 구축 분야의 ‘종전선언 문제’와 비핵화 분야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생산 중단을 물리적으로 확증하기 위한 대출력발동기시험장 폐기’, ‘미군 유해 발굴’ 등을 동시에 토의하려 했으나 미국이 종전선언 문제를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 놓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내용이 대체로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뜻밖이다. 종전선언은 이미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이 연내 성사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적극적으로 언급한 의제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비핵화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을 견인할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그동안 이를 북한 비핵화 수준과 연계하지 않고 적극 추진해왔다. 조기 종전선언에도 큰 관심을 보여 왔기 때문에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7월27일에 종전선언을 한다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폼페이오가 이끄는 미국협상단은 북한이 제안한 조기 종전선언을 귓등으로 들은 것 같다. 북한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사되는 종전선언이 미국의 대북 군사적 옵션의 제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입장을 아무리 전향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북한이 미국의 기준에서 의미있는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종전선언은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협상카드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태도는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종전선언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적극적인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에 새삼 미국의 대북 협상카드가 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북한에 대한 메시지의 일관성에 큰 상처만 줄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비핵화와 북한의 안보 우려를 동시에 해소해 나가겠다는 북-미 정상 간의 합의정신에도 벗어난다. 미국이 여전히 일방적인 선핵포기론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만 확대시킬 뿐이다. 종전선언은 법적 규제를 받지 않는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미국이 유사시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북 군사옵션에 제약을 줄 가능성도 매우 낮다. 2018년판 종전선언의 저작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이 선언을 “상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관계로 나가겠다는 공동의 의지를 표명하는 정치적 선언”으로 규정했다. 국제법적 규제를 받는 협정이 아니라 정전체제 아래서 적대적 갈등을 지속해온 남북·북미 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선언을 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노력을 약속하며, 이를 기회로 남·북·미·중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와 상관없으면서도 복잡한 절차 없이 한반도 평화를 증진하며 북한의 체제안전 인식을 제고시켜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적극 추진해왔다. 북한도 종전선언을 통해 대내적으로 비핵화의 명분을 보다 확실하게 얻고 싶어 할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종전선언은 자신이 북한 비핵화를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체제안전보장에도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결국 미국은 종전선언이 북한에만 유리한 의제가 아니라 북한 비핵화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이를 위한 한국 정부의 설득 노력이 중요한 때다. 그리고 그 중요성으로 보아 외교부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여 종전선언 문제의 논리와 구조를 만든 참모들도 직접 대미 설득에 나서야 한다. 종전선언은 빠를수록 좋다. 굳이 9월 유엔 총회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 한국 정부가 여건만 조성할 수 있다면 분단 73년을 맞는 8·15 광복절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렇게 되면 8월 하순으로 예정되었던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상승효과를 내며 북한이 대대적인 행사 준비를 하고 있는 정권수립일(9월9일) 전에 북한으로부터 의미있고 중요한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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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종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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