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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주한 미국대사와 그들 / 신승근

등록 2018-07-25 19:09수정 2018-07-25 19:54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을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을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
영화 <아수라>에서 비리 경찰과 결탁해 커터칼 테러를 연출한 안남시장(황정민 분)은 비서실장에게 묻는다. “실장님, <와이티엔>(YTN) 메인뉴스에 내 얘기 나왔다면서요?” 실장이 답한다. “리퍼트 미 대사가 피습당했을 때보다 더 의연하시답니다.”

2015년 마크 리퍼트 대사(23대)는 한미연합사령부 해체를 요구하는 김기종씨에게 피습당했다. 피를 흘리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아 화제가 됐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위로 방문을 했고, 쾌유를 비는 기도회, 발레 공연, 굿까지 펼쳐졌다.

고종 때인 1883년 5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루셔스 푸트가 한반도에 발을 디딘 첫 미국대사였다. 공식 대사 직함은 이승만 정권 때 주어졌다. 미국은 1949년 존 무초를 정식 대사로 임명했다. 미국대사는 ‘극진히 모셔야 할 상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사 봉정식을 장엄하게 치르라 지시했다. 무초는 정부가 대사관으로 내준 반도호텔에서 중앙청까지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입장했다. 지금까지 24명의 대사가 부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21대)는 첫 여성, 성 김(22대)은 첫 한국계 대사였다. 제임스 릴리(14대), 도널드 그레그(15대)는 중앙정보국(CIA) 출신이었다.

그들은 막강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 필립 하비브 대사(10대)는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해 ‘수장’을 막았다. 윌리엄 글라이스틴(12대) 대사는 1979년 12·12 쿠데타, 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이해를 대변했다. 신군부는 그를 통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던 시민군은 그에게 평화적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학생들은 80년대 대구·광주·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및 방화로 미국의 책임을 따져 물었다.

국군기무사령부는 67쪽의 계엄 실행 문건에 ‘장관, 주한 미대사를 초청하여 미 본국에 계엄 시행 인정토록 협조’라고 적시했다. 여전히 20세기에 살고 있는 듯하다. 씁쓸하다.

신승근 논설위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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