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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구속영장

등록 2018-08-29 17:58수정 2018-08-30 09:18

전우용
역사학자

깊은 밤, 서울 다동 골목의 작은 기와집 앞. 순사 서너명이 다짜고짜 대문을 발로 차 부수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놀라 깬 남녀 한쌍을 속옷 차림 그대로 끌어낸다. 다만 여성에게는 베개를 머리에 이고 나오게 한다. 난데없는 소란에 이웃 사람들이 나와 구경한다.

여성은 순사에게 사정한다. 옷이나 갖춰 입게 해달라고. 베개는 두고 가게 해달라고. 순사 한명이 비웃으며 대답한다. “네가 입은 속옷과 베개가 증거물이야.” 여성이 그를 자세히 보니 초저녁 요릿집에서 무례하게 굴기에 한마디 쏘아붙였던 바로 그자다. 일제강점기 서울 주택가 골목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졌던 ‘밀매음 단속’의 한 장면이다. 이 순사들은 압수수색영장이나 구속영장 없이 남의 집에 침입해서 집주인을 체포하고 망신까지 주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인신구속은 가장 선명한 권력 작용이자 위력 행사다. 주인은 종을 맘대로 감금했고, 국가권력은 특별한 절차 없이 백성을 구속했다. 근대적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원칙이 확립되기 전에는, 사법은 행정의 일부였고 재판은 수사와 분리되지 않았다.

옛날 우리나라 지방관아 마당에서는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저놈이 바른 말 할 때까지 매우 쳐라”라는 수령의 목소리가 흔히 들렸다. 형벌은 죄의 대가였고, 구속과 고문은 혐의의 대가였다. 억울하게 고문당했더라도 혐의가 풀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천지신명에게 감사하는 것이 권력을 대하는 보통 사람의 바른 자세였다.

1895년 3월25일, 조선 정부는 ‘재판소구성법’을 제정, 공포하여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했다. 그러나 수사와 사법 관행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한국의 악습을 타파하고 시정(施政)을 개선하겠다고 공언한 조선총독부도 권력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관행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4월1일,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어 구속영장 제도가 생겼다. 이 제도 시행을 둘러싸고 경찰과 사법부 사이에 격렬한 마찰이 있었으나, 경찰이 인권 옹호라는 대의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속 결정권이 행정부에서 사법부로 이관되었다고 해서, ‘의심받은 죄’의 대가라는 구속의 성질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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