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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초인종

등록 2018-09-05 18:29수정 2018-09-06 09:37

전우용
역사학자

“우리 상점에 전기로 치는 종이 있는데, 이 종에 딸린 기계를 구비하여 공당(公堂)이나 사삿집이나 이 종을 놓고자 하시면 놓아드리되, 값은 매우 싸오며 이 종을 누르면 하인 부르기에 매우 편한 것이 그 기계 단추 같은 것만 누르면 영척(英尺, feet)으로 삼사백척 밖에 있는 하인이라도 편히 앉아서 부를 터이오니 시험하여보시오.”(1899년 7월29일치 <독립신문> 개리양행 광고)

신분제도가 생긴 뒤 인간은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로 나뉘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행한 지 오래인 현재에도 이 구분은 유효하다. ‘갑’은 부리는 자요, ‘을’은 부림을 당하는 자다. 타인을 부리려면 먼저 불러야 했다. 주인이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부르면, “예. 소인 대령했사옵니다”라고 즉시 대답하는 것이 종의 의무였다. 즉시 대령하려면 늘 주인 가까이 있어야 했다. 이는 종의 행동반경을 제약했고, 주인에게도 종의 노동력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는 손해를 끼쳤다.

1899년 5월, 동대문 옆에 발전소가 건립되어 전기 공급을 개시했다. 전기를 사용한 첫번째 상업용 기계는 전차였다. 그 두달 뒤, <독립신문>에 전기 초인종을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궁궐에 설치된 것을 제외하면, 전등보다 훨씬 먼저 하인 부르는 전기 기계가 도입된 셈이다.

‘전기로 치는 종’의 이름은 곧 ‘사람 부르는 종’이라는 뜻의 초인종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다시 일본어 요비린(부르는 종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그 용도도 주인이 종을 부르는 데에서 객(客)이 집주인을 부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문 옆에 초인종을 달아둔 집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나는 것이 아이들 놀이이기도 했다.

현대인은 종소리에 즉각 반응하는 훈련을 거듭한 사람들이다. 초인종이 울리면 즉시 달려가고, 전화벨이 울리면 즉시 집어 든다. 하지만 다 그러는 건 아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임무를 비서에게 떠넘긴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이 진정한 ‘갑’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종소리로 연결된 시대지만, 부르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사이의 불평등 관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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