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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불온서적

등록 2018-09-19 18:20수정 2018-09-20 13:17

전우용
역사학자

1970년대 말, 한 대학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온서적 열람과 대출을 금지하라는 상부 지시에 따라 사서들이 바삐 움직이는 중에, 한 사람이 서가에서 막스 베버의 책을 치웠다. 작업을 감독하던 상사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 “어이, 카를 마르크스 책을 치우랬더니 막스 베버 책은 왜 치우나?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사서가 대답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경찰은 모를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1980년대에는 가방 안에 막스 베버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책을 넣어 두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곤욕을 치른 학생이 적지 않았다.

책을 탄압한 역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래 수천년간 책은 인간이 서로 사상을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 때문에 권력은 책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직설로든 은유로든 권력을 비판하는 책의 저자, 유포자, 독자들이 화를 입는 필화(筆禍)나 문자옥(文字獄)이 세계 도처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책이 지배계층의 전유물이던 시대에는 절대다수 저자가 권력자의 관점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았다. 불온서적이 대량으로 출현한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이민족 지배와 민중의 탈문맹화가 중첩된 시대부터였다.

1909년 2월23일 ‘출판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형식은 대한제국 법률이었으나 불온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이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한 즉시 서적 수백 종의 발행과 판매를 금지했다.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에 금서(禁書)로 지정된 도서는 3천 종이 넘었다. 해방 후에도 불온서적 지정과 탄압은 계속됐고, 특히 국가보안법은 불온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었다. 한국에서 불온서적은 오랫동안 불법무기나 마약과 같은 물건이었다.

정치권력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에게 순응하지 않는 사상을 불온사상으로 규정하고, 그런 사상을 담은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여 탄압했다. 그러나 태초에 불온서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치권력이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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