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통신이 미비했던 시절에도 프랑스 혁명의 소식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령 생도맹그섬 사탕수수 농장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투생 브레다라는 노예 출신의 흑인이 그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에 나서며 이름도 루베르튀르로 바꿨다. 태어난 농장의 이름 브레다 대신 “길을 여는 사람”이라는 뜻의 루베르튀르를 채택한 것이다. 당시 이윤을 크게 창출하던 카리브해의 농장들 중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생도맹그섬을 많은 나라들이 노렸다. 루베르튀르는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 등과 적절하게 친소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 전략을 펼치는 한편, 군대를 조련하고 유럽인들의 전술까지 익히는 등 군사력을 강화했다. 국지적인 전투에서 패배를 했을 경우에조차 프랑스의 군대에서는 군사 지도자로서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흑인 노예의 노동 조건 개선을 넘어 노예제의 전면적인 폐지를 요구했다. 실질적으로 생도맹그섬을 장악한 루베르튀르의 세력에 압도당한 프랑스 혁명 정부는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했다. 그는 생도맹그섬의 궁극적인 독립은 경제적 자립에 있다고 파악하면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이전의 노예 노동자들이 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정부는 노예제를 부활시키려 획책하며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들이 제안했던 회담에 루베르튀르는 순진하게 응했고, 결국 체포되었다. 프랑스로 압송되는 배에 오르면서 그는 명언을 남겼다. “나를 물리침으로써 당신들은 생도맹그섬에서 자유의 나무의 가지 하나를 자른 것에 불과하다. 뿌리에서 다른 가지들이 솟아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뿌리는 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부관 장자크 데살린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 공화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이티 혁명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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