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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수능은 왜 스피드 게임이 됐나? / 김현경

등록 2018-11-28 18:32수정 2018-11-29 10:08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체스나 바둑을 어릴 때부터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두뇌도 일종의 근육”이며 체스나 바둑은 이 근육을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체스의 고수는 하수보다 머리가 좋을까? 그리고 그 머리를 체스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체스 마스터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전형적인 기보에 대한 지식의 차이였다. 실제 게임의 기보를 보여주고 25개 말의 위치를 기억하게 했을 때, 체스 마스터는 평균 23개를 기억했지만, 아마추어는 12~13개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체스 말을 체스 판 위에 아무렇게나 놓고 위치를 기억하게 하자 마스터와 아마추어 모두 3~4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전문적인 체스 선수는 장기 기억에 1만개에서 10만개 정도의 체스 포지션을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체스 마스터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저장된 장기 기억 덕분이며 추상적인 추론 능력 때문이 아니다.(<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참조)

이 연구는 교육학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른바 ‘교육 전문가’들 중에는 지식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역량”이라고 선언하면서 “역량 중심 교육”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바뀐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였다. 학력고사가 고교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을 묻는 시험이라면, 수능은 독해력이나 추론 능력 같은 ‘역량’을 측정한다. 학력고사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옮겨놓지 않은 사람은 풀 수 없는 시험이지만, 수능은 문제를 푸는 데 충분한 정보를 예시문에 포함해 배경지식 없이도 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수능 국어영역이 일종의 스피드 게임처럼 되어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주어진 정보로부터 어떤 것을 추론하는 능력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다. 웬만한 고등학생은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독해력과 추론 능력을 측정하면서도 변별력을 확보하려다 보니, 지문이 점점 길어지고, 급기야 속독법을 배워야 할 지경이 된다.(학원에서는 지문을 다 읽지 않고 문제를 푸는 요령을 가르친다)

수능 국어영역에서 이번에 논란이 된 만유인력 문제 같은 ‘킬러 문항’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배경지식 없이도 풀 수 있어야 한다는 원래의 전제와 달리, 이 문제는 만유인력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있는 학생은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독해력’이라는 ‘역량’은 본질적으로 장기 기억에 저장된 지식에 의존한다. 독서 행위는 장기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계속 불러내면서 이루어지며, 킬러 문항의 해결 여부 역시 장기 기억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식 중심으로 측정을 하면 킬러 문항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기 나오는 문제들은 대체로 평이하다. 어떤 것은 너무 쉬워서, 저런 것을 모르는 고등학생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50문제를 다 맞히고 골든벨을 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아무도 골든벨을 울리지 못하고 끝나는 때가 더 많다. 골든벨을 울린 학생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할 뿐 아니라 평소에 책도 많이 읽은 학생일 것이다. 그런 학생이라면 대학수학능력이 충분하지 않을까? 국어영역 킬러 문항을 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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