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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슬기로운 ‘민주주의’ 사회 / 홍성수

등록 2018-12-02 18:29수정 2018-12-03 14:57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아시아의 ‘진보’를 주도하던 대만의 진격이 암초에 부딪혔다. 얼마 전 국가 명칭 변경, 탈원전 정책, 동성혼 도입 등을 놓고 벌인 국민투표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국민투표의 전후 상황을 들여다보면, 탈원전 정책이 폐기되었다거나 동성혼 도입이 물 건너갔다는 식의 해석은 섣부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국민투표를 둘러싸고 제기된 엉뚱한 논란이다.

대만의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자 한국의 찬핵 진영은 ‘우리도 대만처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나섰다. 만약 한국 헌법재판소가 동성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반동성혼 진영은 ‘대만처럼 국민투표를 하자’고 주장할 게 뻔하다. 그런데 국민 다수의 의사를 직접 묻는 것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일까? 오히려 이런 식의 의사결정은 소수자 인권을 침해하고 중장기적 과제들을 무력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투표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우리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포퓰리스트’로 부른다.

반대로 핵발전이나 소수자 인권 같은 문제를 민주주의로 결정하면 안 된다는 주장 역시 일면적이다.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본령까지 내던져 버릴 수는 없다. 어떤 문제건 결국 민주주의로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안은 동성혼 같은 소수자 문제나 핵발전처럼 전문적이고 중장기적인 의제에 관해서도 좋은 결정이 내려지도록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양질’의 민주주의 체제는 인권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았고 중장기적 과제에도 지혜롭게 대처해왔다. 실제 동성혼을 일찌감치 도입했거나 탈원전 방침을 정한 국가들은 좋은 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들이다. 그 정책들은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종종 국민 다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사법부는 국민투표로 제정된 헌법과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만든 법률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소신 있게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몇몇 국회의원들도 지역구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국민대표다. 한국에서도 몇 달 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가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이 결정이 국민 다수 의사에 반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헌법재판소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 또한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만능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인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치권에서 소수자 인권에 관한 여러 의제를 다룬 방식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턴가 국회에서는 인권, 차별과 관련한 몇몇 법안이 시민사회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도 않은 채 발의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반대세력의 압력으로 다시 철회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인권이나 차별이 금기어라도 되는지 관련 의제들이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정치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안만 추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후퇴다. 다수자가 소수자의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는 건 쉽지 않다. 탈핵이나 입시 같은 전문적인 문제들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그럼에도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고 사회 곳곳에서 활발한 논의를 통해 건강한 공론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 이 과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논의 자체를 미루거나 다짜고짜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와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정치의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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