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1팀 선임기자 구마모토성은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3대 성곽으로 꼽힌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번갈아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가 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영지에 쌓은 성이다. 이 구마모토성의 원형이 울산 서생포왜성이다. 서생포왜성은 가토가 임진왜란 발발 1년 뒤인 1593년 5월부터 조선 침략의 배후거점 확보를 위해 쌓아 주둔했던 성이다. 가토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1월엔 남하해 오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동쪽 최전선에 위치했던 서생포왜성의 수비 보강을 위해 태화강 하구, 지금의 학성공원에 부하 장수를 시켜 울산왜성을 쌓았다. 그리고 축성이 끝나자마자 그해 12월23일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울산왜성 일대에서 5만여 조명연합군과 1만여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명연합군의 포위공격에다 보급로·급수로를 끊은 고사작전으로 성안에 갇힌 가토를 비롯한 왜군은 갈증과 허기를 견디다 못해 말의 피와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고 종이와 흙벽을 끓여 먹는 극한상황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이 전투의 결말은 가토의 왜군을 구하기 위해 부산과 남해안 일대에서 속속 모여든 6만여 왜군의 협공에 밀려 조명연합군이 경주로 후퇴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끝났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가토는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 구마모토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전투 현장이었던 학성공원에 가면 들머리에 12일 동안의 울산왜성 전투 상황을 날짜별로 요약해 기록한 13개의 비석이 줄지어 있고, 조명연합군과 왜군 진영의 상황을 각각 그림으로 묘사한 석재 부조도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조명연합군 진영 쪽엔 당시 조선군과 명군을 각각 지휘했던 권율과 양호 장군의 기마상(동상)도 나란히 서 있다. 그런데 왜군 진영 쪽엔 석재 부조만 있을 뿐 동상이 들어섰음직한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다. 울산 중구청이 2017년 학성공원 도시경관 정비사업을 하면서 애초 왜군 진영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좌상을 설치하려 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취소했다. 정유재란 최대 육상 격전지였던 울산왜성 전투를 스토리텔링화하려던 조형물 설치 계획이 미완에 그친 것이다. 구청 쪽이 사전에 취지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미흡했던 탓도 있지만 왜군 장수의 동상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시민 정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울산왜성 전투를 비롯해 7년에 걸친 양대 왜란이 끝난 지도 지난해로 이미 420년이 지났다. 60년의 환갑이 일곱번이나 지나간 먼 과거인데도 당시 아픈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100년이 되는 해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재조명과 일제 잔재 청산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두고 국제법 위반을 들먹이며 반발하고, 구조작전 중인 한국 구축함으로부터 일본 초계기가 추적 레이더를 조준당했다며 억지를 부리는 등 한-일 외교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과거 역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 지향의 한-일 관계를 새로이 열어가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과거 역사의 가해자 일본이 지금도 여전히 침략 본성을 버리지 않고 되레 피해자 시늉을 하는 한 과거 역사는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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