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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일부러 틀린 말 / 김하수

등록 2019-01-20 09:30수정 2019-01-20 19:14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대개 잘못된 말이 눈에 띄면 샅샅이 잡아내서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들 한다. 마치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 옷차림을 바로잡아주던 ‘규율부’나 ‘학생지도교사’ 같은 기분으로 규찰하려는 것이다. 국어를 반드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식의 산물이다.

국어를 그렇게 긴장된 마음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언어란 본래 장난, 유희, 희롱의 기능도 있다. 또 더 나아가 비판과 조롱, 풍자까지도 가능하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맞춤법이니 표준어니 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거나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국해우원’이나 ‘국개의원’이라는 표기는 단순히 ‘틀린 맞춤법’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다. 그리고 조롱하려는 의도도 보인다. ‘궁민’도 마치 ‘궁색한 국민’이라는 자조가 느껴진다.

의미의 확장보다는 거친 의미를 장난처럼 가볍게 만드는 경우도 눈에 띈다. 원래는 불쾌한 욕인데도 ‘넘’과 ‘뇬’으로 비틀면서 본래 의미를 살짝 스쳐 지나간다. 비슷한 방식으로 맥락을 가볍게 만드는 ‘감솨’도 자주 쓰인다. ‘했지?’라는 모범생 같은 질문을 ‘했쥐?’ 하며 친근감을 장난스레 표하기도 한다. 그런 감각을 가져야 ‘말아톤’이나 ‘반창꼬’ 같은 영화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컴퓨터 탓이기도 하고 그 덕이기도 하다. 지난날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낄낄거리며 소곤대던 말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목적만을 위해서 변화하지는 않는다. 그 수단과 도구의 질감 때문에 변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로 저지른 오류는 바로잡아야겠지만 의도적인 오류는 해석을 잘해야 한다. 오류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해석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저 느낌, 그리고 더 나아가 공감일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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