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범 한마리와 곰 한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삼국유사> 기이(奇異)편) 환웅이 제시한 기한은 100일이었으나, 곰은 삼칠일 만에 사람의 몸으로 변했다. 인간 생명의 탄생에 관한 한국 풍습이 신화 서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난 지 삼칠일 동안은 대문 앞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며, 100일이 되어야 아기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출생을 공표할 수 있었다. 한국의 아기들은 세차례의 출생 의례를 치렀던 셈이다. 영아 사망률이 무척 높았기에, 100일이 지나지 않은 아기는 존재와 부존재 사이에 걸쳐 있었다. 산모의 젖 부족도 영아 사망률을 높인 이유 중 하나였다. 빈곤으로 산모 자신이 영양실조인 경우가 많아 젖 부족은 흔한 현상이었다. 산모에게서 젖이 나오지 않으면 인근의 다른 산모에게 젖동냥을 했는데, 그럴 수 없으면 미음이나 암죽을 쑤어 먹이곤 했다. 하지만 암죽이나 미음으로는 아기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할 수 없었다. 많은 아기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엄마 젖을 먹을 수 없는 아기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이 분유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몽골 병사들이 우유를 말려 빻은 뒤 휴대 식품으로 사용한다고 썼는데, 이것이 분유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1855년에는 영국의 그림웨이드가 분유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분유 광고가 처음 실린 것은 1927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분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신문 기사가 훨씬 많았다. 한국에 분유가 흔해진 것은 6·25전쟁 이후 미국이 구호물자를 지원하면서부터였다. 분유는 애초 엄마 젖을 먹을 수 없는 유아들을 위한 대용식이었으나 곧 주식(主食)의 지위를 차지했다. 지금 젊은 한국인 대다수는, 분유 먹고 자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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