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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맥주

등록 2019-07-16 17:57수정 2019-07-17 09:34

전우용
역사학자

양조(釀造)의 역사는 농경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술 빚는 원료로는 과일보다 곡식이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곡식일 경우 대체로 주곡(主穀)은 피했다. 한국과 일본처럼 일용할 양식과 신성한 음료를 같은 곡식으로 만드는 문화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보리를 원료로 한 맥주는 고대 지중해 주변에서 기원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북동부 유럽으로 확산했다. 양조 중 홉을 첨가하는 제법은 13세기 바바리아인 수도사들이 창안했다고 하는데, 이로써 맥주 특유의 향기와 쌉싸름한 맛이 생겨났다.

한국 땅에 처음 맥주가 들어온 것은 1871년 신미양요 때였다. 미군 함선 5척이 강화도 앞에 정박하자 조선 정부는 그들의 의중을 탐문하기 위해 문정관(問情官)을 파견했다. 이 문정관은 미군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맥주만 잔뜩 대접받았다. 그가 맥주병을 한아름 안고 찍은 사진이 전한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맥주가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898년 대한천일은행 창립 축하연 자리에 맥주가 올랐고, 1901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가메야(龜屋)상회에서 일본산 에비스 맥주를 수입해 팔았다. 당시 맥주 광고문은 “맥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개화한 사람이 아니다”(不飮麥酒者 非開化之人)였다. 이어 1903년에는 일본 기린맥주도 조선 판매를 시작했다. 1910년 일제 강점 무렵에는 아사히, 기린, 삿포로, 뮌헨 등 4~5종의 일본산 맥주가 조선 시장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이 땅에 맥주공장이 처음 생긴 해는 1933년이다. 이해 8월 조선맥주㈜가, 12월에 소화기린맥주㈜가 모두 영등포에 공장을 세우고 생산을 개시했다. 두 회사는 해방 후 적산불하를 통해 한국인 소유가 됐다. 소화기린맥주는 1952년 동양맥주로, 조선맥주는 1998년 하이트맥주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국산 맥주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맥주는 ‘개화인의 상징’이었던 만큼 값도 비쌌다. 1920년대 맥주 한병 값은 막일꾼의 반일치 임금에 해당했다. 부자가 아니고서는 ‘개화인’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맥주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다. 맥주의 지위가 ‘대중주’(大衆酒)로 격하된 것은 88 서울올림픽 무렵부터였다. 지금 맥주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다. 한국인 모두가 ‘개화인’이 되었다는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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