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수 경제부 산업팀장
편집국에서
얼마 전 대기업의 ㄱ아무개 회장과 저녁을 같이 들었다. 연배가 비슷해서 어느 정도는 터놓고 지내는 사이다. 술잔을 몇 번 돌리는 사이,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가 생각나 운을 뗐다. “한국에도 좋은 기업은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정작 국민이 존경하는 기업, 기업인은 드문 것 같다. ㄱ 회장께서 좋은 경영실적을 거두는 것도 좋지만, 국민이 정말 존경하는 기업인이 되어서, 한국 재계에 이름을 길이 남겼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노-사 협력과 대-중소기업 협력에 앞장서서 한국기업의 경영 패러다임을 대립에서 상생 쪽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겠다”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기업들이 중소 협력업체와 거래를 할 때 원칙적으로 5% 이상 마진율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그 이상 이익이 나면 납품단가를 깎는다. 자기 회사도 산업 중간재를 생산하기 때문에 다른 대기업에 상품을 납품한다. 그런데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여 이익률이 올라가면 어느 틈엔가 귀신같이 알고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한다. 그나마 대기업인 자기네는 사정이 낫단다. 중소기업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다. 솔직히 자기가 중소기업이라도 기술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죽도록 노력해도 결과는 같으니까.
올해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이 경제계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22일에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가 열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 성과 공유제 같은 모범사례가 발표되고, 대기업 총수들의 다짐에 이어, 정부의 지원대책도 나왔다. 사회의 큰 짐이 되고 있는 양극화를 개선하려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생이 듣기 좋은 구호에만 머무는 것 아니냐는 안타까운 소리가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청와대 모임 때 총수가 맨 앞줄에 앉았던 대기업 중에는 ㄱ 회장의 거래업체들도 있다.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대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11조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원동력은 무엇보다 제품 경쟁력이다. 그 밑바탕에는 부품을 댄 수많은 중소업체들의 땀이 스며 있다. 지난해 현대차가 1조7500억원, 엘지전자와 에스케이텔레콤이 각각 1조5천억원의 이익을 낸 배경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연일 경제난이라고 하는데, 대기업은 최대 호황을 구가하는 미스터리와 관련해 “대기업의 천문학적 이익은 우리의 고혈”이라는 중소기업의 울분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대기업들에 딸린 수만개의 중소업체들에 적정 납품단가를 보장하고, 기술 개발과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을 인정해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당장 대기업의 이익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신바람이 나서 일할 것이다. 기술 개발과 생산성 향상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대기업의 제품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매출과 이익 확대를 낳을 것이다. 당장은 이익이 줄어들지만 중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이 살고, 대기업도 사는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인 지엠이 위기에 빠지면서 일본의 도요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정작 세계 최강이라는 도요타의 경쟁력이 중소업체와의 동반자적 협력에서 나오는 것을 주목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모두들 발상을 바꿔야 한다. 〈한겨레〉도 새해에는 ‘초일류 중소기업’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곽정수/경제부 산업팀장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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