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출판사 ‘켈파트프레스’ 대표·미술평론가 자유활동가인 프리랜서는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언제 어디서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단점도 있다. 모든 일엔 장단점이 있고, 강산이 바뀐다는 10여년의 기간 동안 자유생활을 하다 보면 어딘가에 고정적으로 출퇴근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구제금융 시기와 버블경제 모드 스위치를 장착해두고 번갈아 온오프를 누른다. 다행히 아직은 파산하거나 굶어 죽지 않은 채 생존하고 있다. 불안정함이 주는 포상은 여름마다 떠나는 긴 여행이다. 마음대로 일정을 조율하는 휴가는 프리랜서의 장점이다. 물론 무급휴가라는 단점도 있다. 무급휴가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휴가 중에도 열심히 원고도 쓰고 기획도 하고 메일도 주고받는다. 그러고 보니 프리랜서는 여행은 가능해도 휴가는 불가능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여름을 준비할 즈음이 되면 타향병이 도진다. 대한민국 최남단인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더위라면 질색하는 내게 삶의 위안은 매년 여름 일정을 넉넉히 두고 유럽으로 취재 여행 겸 피서를 떠나는 일이다. 전화를 일시 정지해두고 메신저와 이메일로만 업무를 본다. 이건 업무 효율을 높이는 나름의 방법이기도 하다. 상반기에 전화와 미팅으로 어수선하게 진행하던 일들을 글과 문서로 차분하게 갈무리하는 시간을 번다. 근 4년간 여름의 한창인 7~8월을 지구 북쪽에 머물며 여름을 비켜 나가 살아온 비순리적 삶의 방식이 ‘탈이’ 났다. 올해 6월 베를린에서 열리는 48시간 노이쾰른아트페스티벌에 제주 작가들과 기획전을 마련해 참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럽 지역 전체가 6월부터 유례없는 이상고온 현상에 시달렸다. 섭씨 30도 후반이나 40도 초반까지도 올라가는 기막힌 온도에 어쩔 줄 모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유럽 폭염 대참사’로 표현되는 시기였다. 베를린에는 이 폭염에 대항할 에어컨도 선풍기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디지털 노마드를 주장하며 노트북 하나 들고 요령껏 날씨와 국가를 골라 살다가 날씨에 정면으로 도전을 받은 셈이다. 여름을 피하려다 여름을 찾아 뛰어들어 버렸다. 6월의 한국은, 특히 제주는 이례적으로 시원한 날들이 이어졌다. 길어진 장마 기간엔 추울 지경이었다. 7월 초에 드디어 선선한 제주로 돌아왔다. 7월 중순엔 제주시 서쪽 바다 앞 숙소에서 잤다. 제주도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북쪽인 제주, 남쪽의 서귀포를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도 한번 더 나눈다. 제주도에서 일정을 잡을 때 서쪽과 동쪽 지역도 구분해두는 게 좋다. 동서남북을 하루에 다 다니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리다. 내 거처는 북쪽인 제주시지만, 서쪽에 있는 서점의 1주년 파티에 참석하고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매력적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디어마이블루라는 서점은 책을 파는 것을 가장한 이벤트 기획사인지 모른다. 관객을 공중부양시키는 마술사와 김탁환 소설가의 강연을 마련한 첫째날 행사는 야외에서 석양 속에 치렀다. 다음 날엔 제주 서쪽 투어를 문경수 탐험대장과 함께했다. 협재해수욕장의 세룰리안블루였던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햇볕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화산 바위 위에 앉았다. 용암이 흘러내려 제주가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었다. 하와이 말로 평평하게 퍼져서 ‘파호이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산의 무명서점에 들러 인문학 책을 샀고, 유람선을 타고 차귀도에서 오름을 올랐고, 차귀도에서 돌아오는 길엔 남방큰돌고래 떼의 호위도 받았다. 7월 한가운데의 여름날이었지만, 흥미로운 일정들을 따라가느라 더위는 차순으로 밀렸다. 뜨거운 날씨에 단련되고 준비된 제주의 여름은 대책 마련이 안 된 유럽의 폭염처럼 괴롭지 않았다. 게다가 제주에는 아직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여행할 새로운 곳이 많았다. 이젠 여름마다 제주에서 제주로 피서를 떠나 볼 생각이다. 전화기를 일시 정지해두는 것도 좋겠다. 프리랜서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참여자가 대부분 소설가나 편집자들이었던 1주년 행사 날 저녁,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다며 일찍 숙소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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