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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고무신

등록 2019-08-06 17:33수정 2019-08-07 10:05

전우용
역사학자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네.” 일제강점기 세간에서 유행했던 ‘근대 민요’ <고무공장 큰아기>의 가사다. 세루(セイル)는 고급 모직물인 소모사(梳毛絲)를 말한다. 당시 고무공장들에서는 감독이나 기술자들이 접착제 등에 농간을 부려 여자 직공을 괴롭히는 일이 흔했다.

1920년 조선회사령 철폐를 전후하여 한국인 자본도 제조업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양말 메리야스 제조업과 고무신 제조업에서는 일본인 자본을 앞설 정도였다. 대규모 설비투자 없이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던 점, 한국인의 미적(美的) 기호가 일본인과 달랐던 점 등이 주된 이유였다. 특히 고무신 제조업은 조선인 산업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우리나라에는 1908년에 처음 고무신이 들어왔는데, 이때의 고무신이 통고무신이었는지 밑창만 고무로 만든 신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서 고무와 가죽을 혼용한 구두가 수입되어 싼값을 무기로 시장을 확대해 갔다. 1919년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서울 용산에 대륙고무공업사를 설립하고 검정 통고무신 생산을 시작했다. 조선인의 취향에 맞추어 남자용은 갖신 모양으로, 여자용은 가죽 당혜(唐鞋) 모양으로 만들었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하영은 부산 일본인 상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제중원 서기가 되어 알렌에게 영어를 배운 덕에 외무대신 자리까지 오른 인물로서 “귀족이 갖바치처럼 신발 팔아 돈 번다”는 세간의 비난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공장에서 만든 첫 제품을 순종에게 바침으로써 ‘유명인’을 광고에 활용하는 선례도 남겼다. 이후 조선고무공업㈜, 경성고무공업소, 대길고무공업소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고무신 전성시대를 열었다.

고무신은 1960년대까지 가장 대중적인 신발이자 ‘선거철 선심’을 대표하는 물건이었다. 고무신은 아직 몇몇 기업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한국인 대다수에게는 추억 속의 물건이 돼 버렸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발 대부분을 감싸는 신발에 익숙해진 것은 거의 전적으로 고무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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