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7 18:11
수정 : 2019.11.08 02:06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교양영어를 가르칠 때, 첫 시간에 다룬 텍스트는 ‘한국에 있어서 미국의 의미’라는 짧은 글이었다. 백낙청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1985)에 실려 있다. 학교 당국은 그 글이 교양영어와 무슨 관련이 있냐며 간섭하려 들었지만, 나로서는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일이 미국과 무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영문학자이자 한국문학에 관해 글을 쓰는 문학평론가로서 백낙청에게 한국이라는 ‘출신’과 영문학이라는 ‘전공’ 사이의 길항과 조화는 평생에 걸친 화두였을 것이다. 백낙청만이 아니라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한국문학 평론을 겸하는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터. 그들에게 외국문학이라는 전공은 한국 및 한국문학과 무관한 독립적 영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사회 및 한국문학과의 관련성 위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일 게다.
돌이켜 보면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한국문학 평론을 좌지우지하다시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백낙청이 1966년에 창간한 <창작과 비평>, 그리고 김현 등이 1970년에 창간한 <문학과 지성> 두 계간지가 한국문학 담론을 주도했던 1970~80년대가 대표적이었다. 영문학의 김우창 유종호 백낙청 김종철, 불문학의 김현 김치수 김화영 오생근, 독문학의 염무웅과 김주연 등이 한국문학 평론장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런 전통은 김정란(불문학) 윤지관(영문학) 권오룡(불문학) 정과리(불문학) 성민엽(중문학) 임우기(독문학) 임홍배(독문학) 등으로 이어졌고, 연배로는 이들보다 위이지만 등단이 늦은 도정일(영문학)과 황현산(불문학) 역시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한국문학 평론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최근에는 오길영(영문학) 조재룡(불문학) 류신(독문학) 등이 한국문학 평론에 참여하고 있지만, 앞선 세대들에 비하면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문학 평론은 국문학 전공자들의 전유물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 많던 외국문학 전공 평론가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지난달 26일 국제비교한국학회가 ‘한국에서의 외국문학 연구, 그 역사와 전망’을 주제로 마련한 학술대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해 보려는 자리였다.
한국문학 평론을 한국문학 전공자들이 주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 학회 회장으로 기조강연을 한 국문학자 홍정선이 전한, 어느 한국근대문학 전공 교수의 말이 이런 생각을 대표한다. 전에는 한국문학의 역량이 취약해서 외국문학 전공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도록 국문학계의 내실이 다져졌다는 것이다.
국문학계의 역량이 신장되었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외국문학 전공자의 평론 참여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국문학 전공 평론가들 다수가 외국의 이런저런 이론을 즐겨 글에 동원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 중요하게는, 외국문학 전공자라 하더라도 한국어가 모국어인 터에 그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문학 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6일 행사에서 발표를 한 독문학자 안삼환은 자신의 스승인 강두식 전 서울대 교수의 이런 말을 소개했다. “독문학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 문학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강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 중에서 소설가 이청준과 시인 김광규, 평론가 김주연·염무웅이 나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외국문학 전공자의 한국문학 평론을 가로막는 주범은 사실 한국문학 전공자의 텃세가 아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여러 발표자와 토론자가 논문 쓰기를 강조하는 대학의 교수 임용 및 승진 시스템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외국문학 전공자가 임용이나 승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국문학 평론을 할 까닭이 없는데다, 국문학과 외국문학 영역 사이의 칸막이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연구와 비평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분야임에도, 많은 국문학 연구자들이 점수를 따기 위한 논문으로 평론을 대체하는 형편이다. 홍정선 회장의 호소가 절박하게 다가왔다. “한국문학 연구는 외국문학에 대한 관심 없이는 빈곤해지며, 외국문학 연구는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 없이는 살아 있는 의미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bon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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