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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0 17:57 수정 : 2019.11.22 10:36

조형근 ㅣ 사회학자

11월부터 무직자가 됐다. 1년 남짓 한 정규직 교수 노릇을 그만두었다. 대입 때부터 따지면 만 30년 훌쩍 넘게 늘 대학 밥을 먹었다. 이제 소속이 없다. 민방위를 끝낸 지도 한참이라 정말 천하에 ‘무적’이다. 딱히 대안은 없지만, 다시 대학에 적을 두는 일은 없기를 꿈꾼다.

사직 결심 후 몇달 동안 학계의 여러 지인이 말렸다. 서민 주제에 정년보장과 사학연금을 마다하고 백수가 된다니 말리는 게 당연하다. 고마운 마음만 받았다.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입 면접 때 장래희망을 묻기에 교수나 기자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시대가 어지러워 수업엔 소홀했지만, 수업 바깥에서 참 많이 공부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던 무렵, 한국에서 박사학위 따봐야 취직 못한다며 말리던 선배들이 떠오른다. 한국 사회를 알려면 여기서 공부하겠다며 결심을 굳히자 동학의 길에 들어섰다며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이들의 얼굴도 선명하다. 이제 그 길을 떠난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길이었다. 떠난 직장을 탓하기보다는 한국 대학과 지식생산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짚고 싶다. 나는 공부가 좋았고 가르치기를 즐겼다. 영락없이 서생이다. 다만 게을렀다. 대학, 한국연구재단, 교육부가 요구하는 실적 경쟁에 부적합했다. 수많은 학술행사와 잡무, 수시로 날아오는 공문과 각종 평가, 주민 대상 봉사활동 등등. 이 모두를 위한 끝없는 회의와 전화통화와 메일작성과 서류작업에 탈진했다. 밤 열시 전 퇴근한 기억이 거의 없다. 연구자가 아니고 기획사 직원 같았다. 주말도 방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업인 연구와 교육 업무는 빼고 이랬다. 잠 안 자며 훌륭한 연구업적을 내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사실 한국인 대다수가 늘 과로하고 있다. 놀고먹는다고 비판받는 대학교수 따위가 감히 목적 없이 자유로운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요구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자기 밥그릇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증명해야 한다. 한때 국민영웅이던 줄기세포 연구자는 월화수목금금금 연구한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언론은 환호하고 대중은 숭배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신자유주의화의 한 단면이다.

독서와 사색이 대학교수에게 사치라니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국 사회 자체의 모순들을 논외로 한다면 지식생산체제로서 대학의 의미와 기능이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근대 19세기의 대학은 구체제의 권위주의에 맞서던 유럽 부르주아의 거점이었다. 대학은 제 머리로 사유하는 비판적 교양인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으니 진리탐구의 상아탑이었다. 실용적이지 않되 자유로운 엘리트 지식인을 길렀다. 사회학자 만하임이 ‘자유롭게 떠도는 지식인’에 주목하고,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그람시가 ‘유기적 지식인’을 요청한 배경이다. 우리가 저 옛날 대학에서 목도하던 지사형 지식인이 출현한 토양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유형의 지식인은 대학에서 경멸받는다.

2차대전기 미국에서 성장하고 세계로 확산된 연구중심대학-산학협력모델에서 대학은 실용지식의 생산공장이다. 대학의 존재의미는 고도 자본주의에 필요한 유용한 지식의 생산과 기업의 직무훈련비용 절감에 있다. 20세기 말 한국에서 시작된 대학개혁의 목표이기도 하다.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가 아니라 ‘국민의 삶’(사실은 자본)에 직접 기여하는 지식의 생산이 중요해졌다. 모든 것이 엄정화되었다. 연구재단의 기준에 맞는 논문과 학술지만 업적으로 인정받게 됐고, 정부와 대기업 프로젝트의 수주로 연구자의 능력이 판가름나게 되었다. 정부와 언론은 평가를 통해 대학을 줄 세웠다. 자유로운 비판적 연구모임들은 제도권 학회로 변신했고, 대중을 향해 말을 걸던 독립 학술지들은 필자와 심사자만 보는 연구재단 등재지로 변신했다. 혹은 동의해서, 혹은 살아남으려고 상당수 ‘교수지식인’이 이 체제에 순응했다.

한때 한국에서 대학은 고고한 희망의 사다리였다. 거기 가서 엘리트가 되었다. 지금 대학은 누구나 가는 곳이 된 대신 공고한 서열과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으로 민중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 엘리트주의적 상아탑 모델이 답은 아니다. 나는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어떻게든 해볼 요량이다. 남아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분들도 어떻게든 해보셨으면 한다. ‘교수지식인’은 이미 민중에게 외면받고 있다. 어떻게든 하지 않는다면,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퇴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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