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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0 18:46 수정 : 2019.11.11 02:08

안순억 ㅣ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청춘 고문이 잔인하다. 가을 정취가 그윽한 계절 너머에 수능을 박아두었다. 형형색색 물든 자연의 자태 위로 누렇게 뜬 수험생과 학부모 얼굴이 안쓰럽게 겹친다. 경주마처럼 차안대를 쓴 채, 오로지 입시에 코를 박고 계절을 견딘 이들에게 가을의 향취가 가당키나 했을까? 모든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낙낙했던 시절이었지만 수십년 전 ‘학력고사’ 그날의 격렬했던 불안은 날것으로 살아 있다.

경쟁이 더욱 살벌해진 시대다. 운동장은 훨씬 더 기울어졌다. 그때도 가난한 이는 가난하고 부자들은 부유했지만 교실 속에는 두 계급이 섞여 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 계급’을 달고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집 자녀도 일류대를 꽤 들어가던 자수성가가 가능했던 세대였다. 이때의 ‘성공 추억’을 간직한 세대들이 수능 중심 대입을 가장 공정한 입시제도로 여기는 이유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수능 샤프’ 교체가 극도의 ‘멘붕’을 부르는 시대다. 길고 난해한 지문을 순간에 읽어내는 놀라운 신공으로 답을 맞히는 수험생 한편에, 일찌감치 마킹을 끝내고 엎드리는 선명한 자포자기가 교차한다. 철 지난 오지선다 표준화 시험에 인생이 매달린 이 기괴한 풍경은 왜 더 기세등등해지는가?

우리 사회에서 대입은 벼랑의 질서다. 어쩌다 한발 헛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수반한다. 학벌이 갖는 전지전능한 위력은 실화다. 위험한 독점은 날로 가속화된다. 상류의 논 주인이 물을 독점하면 아래 논은 타들어간다. 돈과 지위도 마찬가지다. 신규 임용되는 법관과 검사, 외교관 중에서 스카이 출신이 70~80%에 이른다. 고위공무원과 국회의원, 언론사 간부, 500대 기업 대표를 줄줄이 살펴도 대부분 절반을 넘는다. 대입은 이들이 형성한 독과점 리그에 편입하는 지름길이다. 특목고·자사고를 거쳐 상위권 대학으로 이어지는 ‘골든 루트’는 부모의 경제력과 맞물려 있고, 그 상관성은 날이 갈수록 밀접해진다.

계급적 순혈주의가 위험한 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과 사람을 전부로 여긴다는 데 있다. 공동체가 구조를 방관하면 극한의 각자도생을 부른다. 당연히 ‘성실한 금수저’는 학벌과 인맥과 교양과 지성과 외모까지 모든 것을 갖춘다. 그리고 경험 밖에 있는 ‘고립된 잉여’의 사람과 세상을 모른다. 그들 눈으로 보면, ‘능력은 없고 요구만 많은’ 답답한 사람들이 세상에 넘치는 것이다.

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경고음은 세계 곳곳에서 울린다. 한때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여겨졌던 영국의 이튼스쿨과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 미국의 명문 사립대와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불평등과 불공정을 양산하는 주범으로 지목받는 시선이 뚜렷하다. 부와 지위를 독점하는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근원으로 여겨질 때 나오는 대중의 분노다. 이들이 미리 그려 놓은 잘못된 점선을 따라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진짜 불공정은 학종이냐 정시냐가 아니다. 공정과 정의라는 말도 꽤나 자기편의적인 말이다. 더 높은 권력과 돈에 저항하는 말이지 자신보다 더 낮은 누군가에게 사용하지 않는다. 진짜 공정은 학벌과 능력에 따른 온갖 독점을 허락하는 시스템 전반을 바로잡는 일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대물림되는 위아래의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 경쟁일 때 의미가 있다. 엊그제 교육부가 발표한 외고·자사고의 일반고 일괄전환 계획을 담은 고교 서열화 해소 방안처럼 악순환의 구조를 끊어내는 정책이 이어져야 한다. 수능보다 어려운 문제는 함께 잘 사는 사회의 해법이다. ‘수능 대박’의 꿈속에는 수능 점수 때문에 삶이 송두리째 훼손당하지 않는 존엄한 세상의 꿈도 함께 녹아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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