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2 18:24
수정 : 2019.11.13 13:57
김경락 ㅣ 산업팀 데스크
기존 택시에 불만이 많은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타다’가 퇴출 위기에 몰린 건 결국 돈 문제와 맞닿아 있다. 타다의 사업 모델이 기존 택시 면허를 매입하는 비용이나 ‘플랫폼 택시’ 도입에 필요한 기여금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수익성을 갖추고 있었다면, 혹은 택시 시장의 혁신 비용을 정부가 치를 의사와 여력이 있었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타다 쪽이나 타다를 기소한 검찰을 비난한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말하듯 ‘낡은 규제’나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검찰의 완고함 탓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모두 돈을 낼 의사나 능력이 없는 터라 택시 시장의 혁신이 지체되고 갈등만 커진다.
나라 경제 운용에도 이런 시각을 적용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선 굵은 개혁(혁신이라고 해도 좋다) 청사진을 제시하며 출범했다. 진보·보수 할 것 없이 경제 전문가라면 누구나 한국 경제의 취약점으로 과도한 수출·대기업 의존성, 장기화된 민간소비 부진, 구조화된 가계소득 정체와 불균형을 오랫동안 꼽아온 터라 이런 전환을 반길지언정 토만 달기는 어려웠다.(이는 2014년 당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직후 내놓은 ‘새 경제팀 경제정책 방향’과도 놀랄 만큼 유사하다!) 하지만 집권 반환점을 돈 요즘, 문재인 정부의 청사진은 동네북이 됐다. ‘경제 교과서를 다시 읽어라.’ 보수 언론은 조롱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지만 핵심은 정부가 돈은 쓰지 않거나 아끼며 경제 개혁 혹은 혁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민간 소비 여력 확충을 위한 가계소득 증대의 핵심 전략으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들고나왔다. 나랏돈은 덜 들고 고용주가 더 부담하게 하는 ‘제도’만으로 노동시장 소득을 빠르게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공약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전환 비용과 부담 배분에 대한 숙고 없이 추진된 터라 기업 현장 곳곳에서 갈등이 인다. 정부마저도 비용 부담을 꺼리는데 노동시장 개혁이 쉬울까.
이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는 통합재정수지다. 정부가 한해 거둬들인 돈(총수입)에서 쓴 돈(총지출)을 뺀 금액이다. 비용을 수반하는 거대한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 내내 놀랍게도 통합재정수지는 흑자였다. 2017년엔 21조원, 2018년엔 31조원을 남겼다. 올해는 흑자폭이 줄거나 소폭 적자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큰 틀에선 ‘균형 재정’에 가깝다. 개혁 비용 부담은커녕 민간 부문이 얼어붙는 상황 속에서 정부마저 지갑을 닫아온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조너선 오스트리 조사국 부국장은 일찍이 이런 현상을 가리켜 ‘빚 강박증’이라 꼬집었다. 정신적 병리현상에 빗댈 정도로 재정건전성 집착이 심하다는 뜻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와 같은 재정운용을 한 나라는 건강한 경제를 유지한 독일 말고는 선진국 중에 없다.
정기국회가 열리며 ‘예산 전쟁’이 본격화됐다. 벌써부터 보수 언론과 야당은 ‘세금 살포’ ‘초슈퍼 예산’ ‘사상 최대 예산’ 같은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며 총공세를 편다. 사실은 이렇다. 매해 예산이 사상 최대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경제는 매해 성장하므로),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보다 예산증가율이 현저히 낮을 때도 그들은 언제나 슈퍼 예산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며, 세금은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민간 부문의 부진을 메우며 혁신과 개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걷는 것이다. 국가채무비율은 경제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으며, 재정 규모도 경제 규모에 견줘 부끄러울 정도로 작다. 국가신용등급은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이며 국가 부도위험을 보여주는 금융지표(국가CDS프리미엄 등)는 사상 최저점이다. 사실을 호도하는 호들갑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강력한 재정정책 없이는 개혁과 혁신은 물론 ‘나라다운 나라’라는 아름다운 구호도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sp96@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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