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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없는 자들이 더 힘든 계절

등록 2019-11-24 18:02수정 2019-11-25 13:59

이승욱 ㅣ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오래전 이맘때,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기도로 식사를 시작하는 모임에 함께한 적이 있다. 그날 모임의 좌장이었던 장로님의 식사 기도 첫 문장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없는 사람이 더 힘겨워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너무 분명해서일까, 그전에는 이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위보다 추위가 인간을 더 힘겹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위에 겪는 배고픔보다 추위에 겪는 허기라든지, 더워서 뒤척이는 밤보다 추위로 겪은 불면의 밤이라든지, 옷을 벗을수록 좋은 여름과 그렇지 못한 겨울이라든지….

불 꺼진 새벽 자취방에서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잠과 싸우며 겨울밤을 새우고 변변한 내복도 외투도 없이 일터로 나갔던 몇해의 겨울방학이나, 허기진 배로 차비가 없어 꽤 먼 길을 걸어 다니던 가난한 젊은 시절의 겨울만 생각해봐도 없는 사람들을 더 힘겹게 만드는 것은 겨울이다. 단연 더 처량하고 비참했다. 그때 이후로 모두들이 김장으로 분주한 이맘때면 항상 그 장로님의 기도 첫 문장이 떠오른다.

조금 뜬금없지만 독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인간의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계약과 같은 거래 행위만으로 가능할까? 인간 세상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계약이라는 이름의 거래를 바탕으로 굴러간다. 하지만 이것만이 인간 세상을 유지 가능하게 하는 행위일까?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아니라고 할 것 같다. 분명한 셈법으로 계산하기 어렵지만 사회적 계약과 계산된 거래만큼이나 인간의 정리, 또는 연민과 연대와 같은 것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데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 예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홍준표라는 정치인과 문재인 대통령, 두분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지역에서 태어나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정치인이 된 결과까지 너무 비슷한데, 두 사람의 인품이 저리도 차이 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싶은 것이다. 한가지 가능한 짐작은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일로매진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이득 외에 타인에 대한 선의의 행위에 삶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것, 그래서 그 격차만큼 인품의 차이도 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선의가 꼭 엘리트 법조인 출신 정치인의 삶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몇 계절을 경험하며 힘겨워하던 내가 그 젊은 날을 무사히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비슷하게 가난하고 평범한 이웃의 선의 때문이었다. 500원짜리 국수 위에 삶은 계란 반개를 더 올려주시던 학교 식당 아주머니, 알바를 마치던 날 보너스 몇만원을 더 얹어주시며 힘내서 살라고 격려해주시던 주인아저씨, 아무런 대가 없이 내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여러 선배님들, 은근히 밥값을 내주던 친구들…. 그 후 세상을 살면서 그들에게 받은 것과 비슷한 소소한 선의를 행한 적이 있다. 그 행위로 존재가 뿌듯해진다는 것을, 삶이 가치 있게, 인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거래보다는 선의로 지탱되는 세상을 소망한다. 존 레넌이 ‘이매진’에서 노래한 것처럼, ‘당신은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 말하겠지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오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장로님은 분명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분의 뜻이 ‘돈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에게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 마음이 허기진 자들이 삶을 더 힘겹게 여기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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