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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8 18:08 수정 : 2019.11.28 21:28

지난 25일 볼리비아 중부 코차밤바주의 도시 사카바에서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데스 원주민을 상징하는 깃발 위팔라를 들고 미주기구(OAS) 산하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다. 사카바/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25일 볼리비아 중부 코차밤바주의 도시 사카바에서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데스 원주민을 상징하는 깃발 위팔라를 들고 미주기구(OAS) 산하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나기 위해 모여 있다. 사카바/로이터 연합뉴스

1973년 3월 4일, 칠레에서 의회 총선이 치러졌다. 앞서 1970년 9월 대선에서 남미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좌파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짙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 아옌데는 좌파 정당연합 ‘인민연합’의 후보로 당선한 직후부터 구리 광산과 은행 등 핵심 산업의 국유화, 서민층 일자리 제공, 의료·교육 복지 강화, 어린이들에게 무료 우유 배급 등 사회주의 정책을 단행했다. 전임 우파 정부가 시작했던 토지 수용과 재분배 정책도 확대했다. 미국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1973년 총선에서 기득권 집단을 대변한 기민당과 국민당 주도의 우파정당 연합은 압승을 장담하고 아옌데 축출을 공언했다. 개표가 40%나 남은 시점에 일부 언론은 야당 승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야당 지지자들은 일찌감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자축하며 들떴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기대에 어긋났다. 보수야당 연합 쪽은 하원 2석을 잃은 채 과반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인민연합은 되레 의석을 늘렸다. 아옌데 정부의 2년6개월은 합격점을 받았다. 반대자들이 격렬한 ‘부정선거’ 시위를 벌였지만, 야당이 주도한 선거조사위원회도 선거 결과를 공식 인정했다.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기업가들은 매점매석으로 생필품 공급망과 물가를 뒤흔들었다. 야당 다수의 의회는 총선 이후 석 달 동안 장관 7명과 고위 관리 2명을 해임하고 정부가 제출한 모든 법안을 부결시켰다. 고용주 단체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생산 설비마저 뜯어가 버렸다. 아옌데 정부가 생산을 거부한 공장들을 법적으로 수용하는 조처를 취하자 의회는 되레 기존에 수용됐던 기업들의 국유화를 모두 무효화하는 헌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973년 9월, 칠레 군부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좌파 정부를 뒤엎은 쿠데타에서 대통령궁이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고 있다. 칠레 영화감독 파트리시오 구스만의 다큐멘터리 <칠레 전투> 3부작 중 1부 ‘부르주아지의 봉기’의 한 장면.

거리에선 극우단체들의 반정부 시위를 부추겼다. 시위 지도자 중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도 다수 있었다. 미국은 칠레에 대한 금수 조처로 숨통을 조였다. 기득권 세력과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총선 석달 만인 6월, 군부는 1차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9월, 군부는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아옌데는 끝까지 저항하다 최후를 맞았다. 이후 13년간 군부 독재를 이어갈 피노체트는 “마르크스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충정”을 들먹였다.

2019년 현재 볼리비아는 46년 전 칠레의 기시감을 준다. 남미 최초의 안데스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지난 10월 대선에서 4선에 도전했다가 개표 부정 시비에 휘말렸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개표가 24시간이나 중단됐다가 재개된 끝에 당선된 것이다. 선거 결과에 불복한 반대파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모랄레스는 북·남미 대륙 35개국 협력체인 미주기구(OAS)에 재검표를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미주기구 조사단은 모두 보수 우파 정부가 집권한 미국,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가 주도했다. 미주기구는 “부정 사례가 산적해 있다”며 재선거를 권고했다. 모랄레스는 재선거를 수용했으나 볼리비아 야권과 군부는 모랄레스의 사퇴를 요구하며 압박했다. 반대 세력의 폭력 시위도 한층 거칠어졌다.

모랄레스는 선거 3주만인 지난 11일 “가장 교활하고 부도덕한 쿠데타”라는 비난과 “형제자매들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는 호소를 남기고 전격 사임한 뒤 멕시코로 망명했다. 권력승계 서열 2, 3위인 집권당 소속 부통령과 상원의장도 동반 사퇴했다. 이튿날엔 야당의 자니네 아녜스(52) 상원 부의장이 임시 대통령을 자임하고 나섰다. 26일엔 모랄레스 집권 이후 11년 동안이나 공석이었던 미국 주재 대사를 지명했다.

모랄레스는 볼리비아의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수백만명을 빈곤에서 구제했지만, 무리한 정권 연장 욕망으로 자충수를 뒀다는 비판도 나온다. 어쨌든 14년이나 집권해온 모랄레스 정부가 한순간에 정권을 포기해버린 것은 상식적으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모랄레스의 사퇴 이전엔 야권이, 사퇴 이후엔 모랄레스 지지세력이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사상자도 속출하고 있다. 부정선거 시비→ 반정부 시위→ 정치·경제적 위기 확대→ 쿠데타로 이어지는 과정은 남미에서 좌파정권 교체의 익숙한 시나리오다.

볼리비아 사태에 대해선 서방 언론에서까지 심심찮게 쿠데타 의혹을 제기한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지난 24일 ‘어떻게 무명의 상원의원이 볼리비아 대통령 모랄레스를 대체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신문은 “아녜스가 모랄레스의 후임자가 될 가능성은 작았다”며, 지난달 대선 불출마와 내년 1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을 만큼 존재감이 미미했다고 전했다. 진짜 배후가 따로 있는 ‘얼굴마담’일 뿐이라는 의심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볼리비아 대선에서 부정개표 시비 끝에 축출당한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공백을 메운 보수야당 소속 자니네 아녜스 임시대통령(왼쪽)이 지난 24일 모랄레스의 출마를 금지한 새 대선 실시 법안에 서명한 뒤 발언하고 있다. 라파스/AFP 연합뉴스

앞서 미국 시사주간 <네이션>은 ‘볼리비아의 쿠데타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선 당일은 초반 개표 때부터 이상한 일로 얼룩졌다”고 지적했다. “(반정부 세력의) 시위와 폭력이 거세지면서 비판 진영에선 모랄레스의 사퇴 요구가 커지기 시작했고, 정부 각료들과 여당 의원들의 집과 가족이 폭동의 목표물이 됐으며, 군대와 경찰이 모랄레스에게 사퇴를 요구”했던 숨가쁜 과정을 되짚었다. 이 잡지는 “머리가 핑핑 도는 일련의 사건들은 복잡한 사회과학적 수수께끼”라며 ”모랄레스 축출에는 많은 요인이 있지만, 군부의 개입이 아무리 완만했더라도 그것을 쿠데타로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남미는 한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구의 정반대 쪽에 있다. 지정학적으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경제 교류도 아시아권이나 미국, 유럽에 견주면 비중이 작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관심도 멀다. 그러나 오랜 군부 독재와 외세의 간섭, 혁명과 반혁명의 반복, 끈질긴 민중의 저항과 승리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선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코즈모폴리턴. 세계(국제)적인’ 또는 ‘세계인’이란 뜻의 영어 낱말이다. 개별 국민국가의 경계나 배타주의에 갇히지 않는 태도, 또는 그런 사람이라는 함의가 있다. 오늘날 코즈모폴리턴의 탄생은 교통·통신의 발달과 개인의 자유권 향상, 국가 간 평화 공존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온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다 코즈모폴리턴은 아니다. 누구나 민주주의, 인권, 다양성의 인정, 정의와 공정 같은 인류의 보편가치를 누릴 권리를 지지하고, 뉴스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된 것을 가리는 식견이 있어야 한다. 멀리는 남미와 유럽, 중동에서, 가까이는 홍콩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시위에 관심을 갖고, 그게 보편가치에 부합한다면 기꺼이 지지와 연대를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조일준 ㅣ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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